<미스터 션샤인>.

<미스터 션샤인>.ⓒ tvN


<미스터 션샤인> 속의 대표적 친일파는 이완익(김의성 분)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친일파의 등장은 너무 빨랐다. 친일파가 형성될 만한 역사적 조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등장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주 희귀한 정치적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관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파'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려면 그에 필요한 조건들이 성취돼야 한다.

예컨대, 한국이 아프리카를 핵심적 군사동맹국으로 삼아 세계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우리 사회에 있을 수는 있어도, 지금 단계에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친아프리카'파를 형성해 여의도에 입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아프리카를 잘 알고 그곳 사람들과 친한 정도가 아니라, 그쪽과의 동맹을 발판으로 한국의 운명을 움직여보겠다고 결심한 친아프리카파가 국회 의석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지금 단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신미양요 직후 친일파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완익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tvN


<미스터 션샤인> 속의 이완익은 1871년 신미양요 직후에 친일파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 조선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서는 걸 보면서 그는 일본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데 적어도 1876년 이전에는 조선에서 친일파가 형성되기도 힘들고, 친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힘들었다. 왜냐하면, 일본을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감정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일본의 경제력을 과소평가하는 분위기도 지배적이었다. 일본 무신정권 지도부인 막부(바쿠후) 내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우리 경제가 조선을 앞지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변화를 간파하지 못했다. 이렇게 일본을 없이 여기는 분위기에서는 친일파가 형성되기 힘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1869년에는 양국 국교마저 단절됐다. 드라마 속 이완익이 친일파가 되겠다며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시점에,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단절돼 있었다.

1868년까지 대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한 것은 일왕(천황)이 아니라 막부 지도자 쇼군이었다. 쇼군은 우리말로 '장군'이지만, 최고지도자라는 어감을 살리려면 '장군님'으로 번역돼야 한다. 이 쇼군의 국가대표권이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소멸됐다. 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세력이 막부를 없애고 일왕을 국가대표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1869년, 일본이 조선에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접수조차 거부했다. 이전 국서에는 없었던 일왕이란 존재가 거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멸시 감정을 갖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일본 국가대표가 '천황'이란 이름을 갖는 게 불쾌했다.

거기다가 쇼군 대신 '천황'을 내세우게 된 경위를 일본 측이 사전에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로서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조선의 보복조치로 1869년부터 양국 관계가 끊어졌던 것이다.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대외강경책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역사적 맥락과 어긋나는 드라마 속 친일파 관련 설정

그렇게 끊어진 관계가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으로 복구됐다. 메이지유신 이후로 국력이 급상승한 일본이, 서양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를 강제 개방시키는 방법을 모방해 조선을 개항시킨 결과였다. 강화도조약에 힘입어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정상화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일본 기업을 조선 시장에 침투시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됐다.

전통적으로 일본을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감정이 조선에서 지배적이었던 데다가 1869~1876년 기간에는 위와 같이 국교마저 단절돼 있었기 때문에, 이완익 같은 서민층이 단독으로 친일을 결심하고 일본 측과 교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완익이 1871년부터 친일을 향해 달렸다는 드라마 속 설정은 그래서 역사적 맥락과 어긋난다.

그럼, 초기 친일파는 어떤 식으로 형성됐을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친일파 형성이 가능했을까? 1876년 직후부터 가능했을까? 아니다. 시간이 좀더 필요했다.

강화도조약을 지켜보며 친일파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이완익같은 자발적 친일파는 쉽게 출현하지 않았다. 만약 조선에 그런 움직임이 일어났다면, 일본 정부가 친일파 양성을 위해 따로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 양성을 위해 일본이 벌인 일 중 하나가 흥아회(興亞會) 같은 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친일파를 만들 목적으로 그런 단체를 키웠다는 것은 자발적 친일파의 등장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시아를 일으킨다는 의미의 흥아회는 1880년 해군 대위 소네 도시토라(1847~1910년)가 주도적으로 만든 조선·청나라·일본 3국의 네트워크 단체다. 표면상으로는 해군 장교가 만든 단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박영미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학 객원연구원의 '전통 지식인의 친일 담론과 그 형성 과정'은 이렇게 말한다.

"흥아회의 일본측 회원은 관료와 지식인, 군인, 상인 등 다양하지만 당시의 유력자들이었으며, 이 단체는 천황의 은사금을 받아 경비로 쓰고 있던 점으로 보아 관변단체적인 성격이 농후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이 발행한 <민족문화> 제40권에 실린 논문.


한편, 일본측 초대를 받고 흥아회에 참석한 조선측 인물들은 주로 사신단 구성원들이었다. 그들의 면면 중 일부는 이렇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의 수행원이었던 이조연, 윤웅렬, 강위 등이 흥아회의 초청을 받아 9월 5일 모임에 참석하였다. 1881년 6월 23일 흥아회 모임에는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건너간 인사들 중 김용원, 홍영식, 어윤중과 이원회의 수원(수행원) 심의영, 조준영의 수원 이봉식이 참여하였고, 이중 홍영식, 어윤중, 이봉식 등은 흥아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시를 지었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에서 사신단이나 방문단이 올 때마다 흥아회 모임을 열어 친선을 도모했다. 흥아(興亞)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서양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를 표방했다. 외형상 좋은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별 거부감 없이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임에는 술과 시가 등장했다. 참석자들은 술을 마시면서, 아시아의 단합과 조·일의 화합을 도모하는 즉흥시들을 지어냈다. 일본인들은 즉흥시 속에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개중에는 임진왜란 같은 과거지사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내용의 시를 읊는 이도 있었다. 이에 대해 홍영식 같은 조선 관료는 '우리는 하나의 땅'이라는 뜻인 동주(同洲) 같은 단어들로 화답했다.

188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이 조선을 정치적으로 괴롭히지 않았으므로 '동주' 같은 표현을 쓰는 게 당시로서는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점점 강해지는 속에서 이런 모임이 계속 열리다 보니, 친일적 감정을 갖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형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신문물이 들어오는 주된 통로 중 하나가 일본이었으므로, '서양문물로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생각과 '일본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어렵지 않게 뒤섞일 수 있었다.

조선 멸망 뒤 후작 작위와 은사금 받은 박영효

 박영효.

박영효.ⓒ 퍼블릭 도메인


흥아회 모임 출신 중에서 저명한 친일파로 부각된 인물 중 하나가 김윤식이다. 1885년부터 흥아회에 참석한 그는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 1894년에 조선을 일본식으로 개조하는 데 앞장섰다. 친일내각인 김홍집 내각에 참여해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일본식 개조를 주도했다. 조선 멸망 5년 뒤인 1915년에는 일본제국학술원상도 수상했다.

일본은 조선 멸망 직후 김윤식에게 일본 작위를 제안했다. 이 정도로 김윤식은 일본의 신임을 받았다. 다행히도 김윤식은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철종의 부마로서 김옥균과 함께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훗날 친일파로 활약한 박영효도 흥아회 출신이다. 그는 1882년부터 흥아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 멸망 뒤에 박영효는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김윤식·박영효 같은 인물을 배출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흥아회를 통한 일본의 친일파 양성 작전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이완익처럼 자발적으로 친일파가 되는 경우보다는, 김윤식·박영효처럼 일본의 체계적 유인작전에 넘어가 친일파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친일파가 형성되려면 그에 맞는 환경과 시스템이 필요했다. 조선이 일본을 두려워하게 된 1876년 이후에야 일본의 힘을 이용해 뭔가를 도모하려는 이들이 생겨날 수 있었고, 그것도 일본 정부가 친일을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뒤에나 그런 생각의 실천이 가능했다. 아무 때 아무데서나 하고 싶다고 해서 친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미스터 션샤인> 속의 이완익처럼 배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래! 오늘부터 친일파 1일" 하고 결심하는 식으로 친일파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친일파 형성은 일본이 공을 들인 결과로 나타난 일이다. 드라마 속 이완익처럼, 일본 정부가 의도하지도 않은 때에 자발적으로 친일파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이들이 있었다면, 일본이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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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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