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초이.

유진 초이.ⓒ tvN


tvN 주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미서전쟁(미국·스페인 전쟁) 뒤 조선에 파견된 가상의 재미동포 장교,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전쟁은 스페인 식민지 쿠바의 독립을 지원하고자 미국이 스페인과 싸운 사건으로, 쿠바가 독립을 획득하는 결과뿐 아니라 태평양 상의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괌과 대서양 상의 스페인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땅으로 편입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미서전쟁은 1898년 2월 5일 미국의 선전포고로 시작해 12월 10일 평화조약으로 끝났다. 드라마 속의 유진 초이가 조선에 온 것은 그 뒤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 드라마에서는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언급되지 않았다. 지금 이 드라마는 1904년 직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에는 재미동포 건맨(gunman) 유진 초이, 조선 건맨 고애신(김태리 분), 재일동포 검객 구동매(유연석 분)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들 세 무사의 무용담을 보여주겠다고 표방한 드라마가 아니다. 3인 사이의 묘한 감정을 묘사하겠다고 표방한 드라마도 아니다. 1871년 신미양요(조선·미국 전쟁) 이후의 파노라마 같은 조선의 운명을 보여주겠다고 표방한 드라마다. 그렇기 때문에 1904년 직전 조선의 운명을, 이 드라마는 최대한 반영해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드라마가 보여주는 시대 풍경이 지극히 피상적이다. 한문 실력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잉글리시, 엿보다 달콤하고 먹기 편한 알사탕, 가마보다 훨씬 편하고 빠른 전차 등을 접한 고애신과 주변 사람들이 놀람과 감탄을 표하는 장면을 통해 그 시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역사를 잘 모르는 100년 뒤의 방송 제작진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소재로 사극을 만든다면, 5G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에 놀람과 감탄을 표하는 대중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이 시대 분위기를 스케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는 핵심 요소는 그런 기술적 진보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실업 문제, 재벌 문제, 최저임금, 범죄 예방, 사회 안전, 한반도 평화, 적폐청산 등을 둘러싸고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적 변화에 반응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 문제를 더욱 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러일전쟁 직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새롭게 도입되는 서양문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기 시대 문제들에 대해 진지한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적 진보보다는 시대 문제에 마음을 더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진 초이가 조선에 오기 직전 발생한 결정적 사건

 고애신.

고애신.ⓒ tvN


드라마 속의 유진 초이가 방한하기 직전인 1898년, 조선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형성하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중요한 협정이 체결됐다. 주일 러시아공사 로만 로마노비치 로젠과 일본 외무대신 니시 도쿠지로가 체결한 로젠-니시 협정의 핵심은, 러시아는 만주 경영에 집중하고 일본은 조선 침략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훈련교관 및 재정고문이 철수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다. 이것이 7년 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됐다. 드라마 속의 유진 초이, 고애신, 구동매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빌을 디디고 있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위기가 가중되는데도 조선은 대응할 힘이 없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개칭돼 외형상은 강해졌지만, 실속은 없었다. 대한제국 선포는 1896년부터의 러·일 세력균형으로 어느 한 나라도 조선을 장악할 수 없게 된 틈을 활용한 조치였을 뿐이다. 로젠-니시 협정으로 일본이 세지면서 조선은 다시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고, 황제국 위상은 더욱 더 껍데기로 변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황제국이란 허울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스스로를 개혁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조선 정부가 정권을 지킬 욕심에, 그런 역량들을 죄다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1894년, 이 시대의 최대 직업군인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했지만, 고종을 대표로 하는 국가권력은 이들을 진압하고자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가 불청객 일본군까지 함께 불러들이는 화를 자초했다. 결국 고종은 청나라가 아닌 일본군의 힘을 빌려 동학군을 진압했다. 동학군이 궤멸되면서 조선은 민중의 힘으로 나라를 개조할 기회를 상실했다.

동학이 진압된 뒤, 새로운 데서 역량이 표출됐다. 서양 문화를 접한 신지식인들이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해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모색한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1898년 공권력을 앞세워 이 역시 진압했다. 정치 시스템이 바뀌면 자기 자리가 위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조선은 대중의 힘은 물론이고 신지식인들의 힘도 빌릴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그래서 1904년 직전의 조선 사회는 정부에 대한 실망감 내지 분노와 더불어, 향후 방향을 확신할 수 없는 데서 생기는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미스터 션샤인>이 묘사하는 1904년 직전의 조선 대중은 그런 분위기에서 살고 있었다.

조선왕조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당시 유생들


 구동매.

구동매.ⓒ tvN


대중과 신지식인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됐다면, 전통적 지식인인 유생들 쪽은 어땠을까? 입만 열만 충군(忠君)을 열변하는 그들이 정부를 도와 나라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 상당수가 지주계급이었으니,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활용해 나라를 도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시대에는 유생들이 주축이 된 의병 활동이 많았다. <미스터 션샤인> 속의 고애신도 유생은 아니지만 의병 활동을 하고 있다. 유생 출신 의병들은 지역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일반 농민들을 구국 투쟁에 동원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들도 믿기 힘들었다. 동학과 독립협회를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고종이 의병들을 바라볼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생 출신 의병들이 겉으로는 충군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반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을미년인 1895년의 명성황후(민비) 시해에 격분해 일어난 을미 의병 때도 고종이 의병들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적지 않았다. 사단법인 '의병정신 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장인 역사학자 이태룡의 <한국 의병사> 하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에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일제의 공포로부터 한숨을 돌리던 국왕은 춘천부·충주부 관찰사, 안동부 관찰사·경무관, 강릉부 경무관, 해주부 경무관·총순, 진주부·함흥부 참서관, 나주부 참서관·총순과 각지의 군수 등 30여 명, 일본인 40여 명이 의병들에 의해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총순'은 경찰 직책이었다. 관찰사와 군수를 포함한 지방관 수십 명이 피살된 사건은 의병들이 읍성 점령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관찰사와 군수는 지방에서 왕명을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유생들이 무기를 들고 지방관을 죽였다는 것은, 그들이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왕조 전복을 시도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성을 간파했기에, 고종은 의병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신속히 의병 해산령을 내렸다.

나라를 위해 일어섰다는 선비들이 왕명을 받은 신하들을 죽였다는 것은, 선비들 역시 조선왕조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농민들과 신지식인들에 이어, 사회의 동량인 유생들조차도 왕조에 희망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대중을 꽉 붙들어줘야 할 지식인들조차 자기 시대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심한 공황을 겪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tvN


그래서 1904년 직전의 조선 대중은 2018년의 대한민국 SNS에서 표출되는 것보다 훨씬 더한 고민과 방황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는 일본이 세차게 밀려오고 안에서는 개혁의 동력을 상실한 그들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고통을 초월했을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은 그런 시대 분위기를 거시적 차원에서 조명하겠다며 출발한 드라마다. 총칼을 든 무사들의 낭만적 만남으로는 그런 분위기를 담을 수 없다. 잉글리시·알사탕·전차를 신기해하는 눈길로도 그런 분위기를 담을 수 없다. 세상의 운명을 걱정하고 생존 문제를 염려하는 당시 대중의 걱정 어린 시선을 드라마에 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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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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