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미스터 션샤인>.ⓒ tvN


조선과 미국의 전쟁인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인생이 확 뒤바뀐 한 남자의 삶. 이를 다룬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tvN 사극 <미스터 션샤인>이 토요일인 7일 밤에 첫 방송을 탔다. 주인집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친 노비 소년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신미양요 직후 미국 군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 뒤 조선에 파견되어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신미양요에 대한 이 드라마의 관점은 비교적 '무난'하다. 신미양요 당시 조정에서 있었던 실권자 흥선대원군(최종원 분)의 발언을 통해, 이 드라마는 '전투에서는 미국이 이겼지만, 전쟁이나 외교에서는 미국이 이겼다고 볼 수 없다'는 관점을 보여줬다. 미국이 이겼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전쟁을 일으킨 목적인 국교 체결 및 통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철군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을 바라보는 시각

이 드라마는 조선이 전쟁을 당한 원인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근시안과 권력욕을 보여줬다. 대원군이 세상을 넓게 인식하지 못한 것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심이 과했기 때문에 전쟁을 자초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런 관점은 '무난'한 편이다. 휴전선 이남의 역사 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점이기에 그렇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아끌면서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이남으로 내려왔다. 바로 그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무난'은 '몰지각'으로 뒤바뀐다. 신미양요를 바라보는 한국의 시각은 북한 입장에서는 지극히 '몰지각'한 편이다. 사실, 북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제3자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남한의 관점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남한의 역사 교과서는 신미양요를 통해 조선이 외세 침입을 물리쳤다는 지극히 당연한 측면을 언급하기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는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시킨다. 일례로,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발행한 <고등학교 국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이 침략을 막은 점은 인정하면서도, 통상수교 거부로 인해 문호개방 즉 시장개방이 늦어졌다는 점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평가다. 다른 교과서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상교육출판사가 2011년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역시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라면서도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여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고 비판했다.

고구려·백제도 당나라가 향후 2세기 이상 최강국 지위를 유지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항전했다. 한국 역사교과서는 당나라에 대한 항전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유독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만큼은 '앞날을 예견하지 못하고 무익한 대응을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운현궁에 전시된 흥선대원군 영정.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운현궁에 전시된 흥선대원군 영정.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김종성


미국이 조선과의 수교통상을 희망한 첫째 목적은, 북태평양에서 조업 중인 미국 선박들이 조난사고를 당하거나 식량이 필요할 경우에 조선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는 데 있었다. 조선과의 무역은 차순위의 목적이었다. 청나라가 세계 최대 시장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장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자국민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원군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 1회는 대원군의 완강한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사실은 달랐다. 음력으로 고종 2년 8월 17일자(양력 1865년 10월 6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경상도 해안에 표류한 미국인 3명을 구호하고 식량과 선박까지 제공하면서 귀국의 편의를 봐줬다.

또 조선 정부의 공식 일기인 <일성록>에 따르면, 1866년에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에 표류하자 대원군은 인도적으로 구호한 뒤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다만, 같은 해에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이 선박이 경고를 무시한 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침투하면서 선제 사격을 했기 때문이다.

또 신미양요 직전에 미국이 청나라를 통해 선전포고 문서를 보내오자, 대원군은 평양감사 박규수(훗날의 개화파 영수)가 작성한 답변서를 통해 '수교·통상은 안 해도, 종전처럼 미국 선박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천명했다.

이랬는데도 미국이 침략을 감행했으니, 항전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기를 든다면, 그게 더 비정상이다. 미국이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을 갖고 왔다 해도, 일단은 조선을 침략했으므로 거기에 맞서는 게 우선이었다.

사실,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근사한 명분을 들고 조선에 접근했다. 일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침략한 게 아니었다. 일본 역시 조선과의 무역이나 조선의 근대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무조건 백기를 들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정치인들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4년이나 5년 단위로 사고하듯이, 옛날 정치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 서적을 근거로 그 시절의 거시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1871년 당시의 정치인들은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는 일이 급선무였다. 우리가 역사 서적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그들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태도다.

어떤 모순들

 신미양요 격전지 중 하나인 광성보. 인천시 강화군에 있다.

신미양요 격전지 중 하나인 광성보. 인천시 강화군에 있다.ⓒ 김종성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군사력은 신미양요 당시 미국의 군사력보다 강했다. 17세기 중반의 청나라는 동아시아를 제패할 만했지만, 1871년 당시의 미국은 영국·러시아에 뒤지는 2진급 국가여서 동아시아를 제패할 힘이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영국·러시아뿐 아니라 프랑스·독일에도 뒤지는 후발주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미양요 때 미국에 맞선 대원군보다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정면 승부를 주장한 척화파 김상헌이 사실은 훨씬 더 무모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대원군은 무모하다 하고 김상헌은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말한다.

이런 모순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들이 신미양요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이 서울 용산과 경기도 평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정상적인 역사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대원군이 러시아나 일본의 침략을 그런 식으로 물리쳤다면, 그것이 조선 근대화에 도움이 되건 안 되건 한국에서는 분명히 대원군을 영웅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몰아낸 외세가 74년 뒤인 1945년에 38도선 이남을 점령했기 때문에 아주 몹쓸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남한은 주한미군 때문에 신미양요를 공정하게 바라볼 수 없는 반면, 북한은 그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왜곡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시각은 남한과 확연히 다르다.

각각 인천대·한국외대에 속한 김복영·한관종 두 학자의 공동 논문 '남북한 역사교과서 속의 미국 관련 내용 분석(The portrayal of the U.S. in South and North Korean History Textbooks)'은 신미양요에 대한 남북한 교과서의 서술방식 차이를 소개한다. 한국인 학자들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영어 제목을 병기하는 것은 이 논문이 한글이 아닌 영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남한의 중학교 역사 교과는 이 사건에 관한 사실 정보만 담고 있는 데 반해, 고등학교 교과서는 사건에 관한 짤막한 설명만 제공한다. 그런데 이 교과서들은 그(신미양요)에 수반되는 쇄국정책이 조선 근대화에 해로웠다고 가르친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학교) 5학년용 북한 역사 교과서는 이 싸움을 긍정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쇄국정책이 외국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한 조선 민중의 애국적 결의를 반영한다고 가르친다." -<사회과 교육연구> 제14권 제2호 중에서.

 광성보에서 벌어진 전투.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광성보에서 벌어진 전투.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신미양요가 외세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서술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당연한 서술이 한국 교과서에는 없다. 그러나 북한 교과서라고 해서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1950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이러다 보니, 북한 정권 수립 이전에 벌어진 신미양요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미양요 때 조선이 전투 측면에서 패했다는 점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에 지기 싫어하는 심리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동국대 역사교육과 한철호 교수의 논문 '북한 역사학이 본 우리 역사 속 전쟁 4편-신미양요, 미국 침략자들의 1871년 대규모 무력침공'은 1987년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통사>를 근거로 북한측의 서술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서 미군 100여 명을 살상했다거나 어재연의 지휘 아래 광성진(광성보) 수비병 70명이 미군의 공격을 집중포화로 저지시켰다는 등 사실 자체를 왜곡·과장하는 서술이 되풀이되고 있다."-<내일을 여는 역사> 제13호 중에서.

실제의 미군 전사자는 3명이다. 이런 사실을 숨기고 조선군이 엄청난 전과를 거둔 것처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주한미군의 위압감 때문에 신미양요를 정당한 방어전쟁으로 기술하지 못하는 반면, 북한에서는 미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조선 측의 군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과대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미양요에 대한 남북한 교과서나 드라마의 관점은 역사학자나 드라마 제작자의 책임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 간의 예속관계, 북한과 미국 간의 대결관계가 공정한 역사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 관계들을 해소하고 새로운 대미관계를 만들어야만, 신미양요를 비롯한 역사적 사건들을 공정하게 바라볼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