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지난 5일 오후 방송된 SBS 시사 토크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보면서도 그랬다.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는 게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번 감동은 색달랐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시사 토크 프로그램이다. 시사 토크 프로그램은 사회적 논란이 첨예한 문제를 주제로 열띤 공방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동보다는 주로 논리가 앞선다.

그러나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아래 블랙하우스)는 달랐다. 블랙하우스는 첫 꼭지에 2018러시아 월드컵 특집 '아! 맞다, 월드컵이지?' 코너를 다뤘다. 이 코너엔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과 최용수 전 서울FC 감독, 그리고 독일 출신 방송인 니콜라스 클라분데가 패널로 자리했다. 세 사람은 한국과 독일 축구 대표팀 경기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약 10분가량이 지났을까, 한 명의 패널이 합류했다. 주인공은 하석주 현 아주대 감독이었다. 차 전 감독은 하 감독을 보자 얼싸안았고, 하 감독은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하 감독에게 차 전 감독은 이렇게 위로를 건넸다.

 하석주 아주대 감독은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20년 만에 재회했다.

하석주 아주대 감독은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20년 만에 재회했다. ⓒ SBS


"왜 이렇게 마음에 두고 살어. (축구를 하다 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축구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의 만남은 흡사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광경을 방불케 했다.

1998년 월드컵의 비극, 20년이나 갈 줄이야 

차범근과 하석주의 만남은 여러모로 각별하다. 이 지점에서 시계를 1998 프랑스 월드컵으로 되돌려보자.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국민적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지역예선에서 일찌감치 본선행을 확정한 데다, 조추첨 결과도 나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멕시코, 벨기에, 네덜란드와 한 조에 속했다. 네덜란드를 빼면 해볼만 한 상대였다. 특히 멕시코와의 경기는 잡아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전 월드컵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멕시코였는데, 적어도 멕시코만큼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차범근 감독의 존재감 역시 대단했다. 도쿄에서 열린, 이른바 '도쿄 대첩'에서 일본에게 2-1 역전승을 거둔 뒤 차 감독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외신도 대회 직전 대표팀을 이끌고 프랑스로 온 차 감독을 '동방의 베켄바워'라며 치켜 올렸다.

여러모로 첫 승은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경기를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다. 경기 초반 분위기도 좋았다.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하석주였다. 기대했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98프랑스월드컵에서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장면.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98프랑스월드컵에서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장면. ⓒ SBS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하석주가 상대팀 선수에게 백태클을 가하다 퇴장 당한 것이다. 마침 대회 직전 월드컵을 주관하는 FIFA는 백태클을 엄격히 규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석주는 이 기준에 따라 퇴장 당한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심판이 레드 카드를 꺼내들자 하석주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때 중계화면에 비친 하석주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경기 흐름은 멕시코가 주도했다. 멕시코는 세 골을 몰아 넣으며 승리를 챙겼다. 이때부터 여론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했다. 언론은 차 감독의 선수기용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네덜란드와의 두 번째 경기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대표팀은 한국 진영을 마음껏 휘저었다. 이 경기 이후 참극이 벌어졌다. 차 감독이 현지에서 전격 해임된 것이다.

하 감독은 '그때의 일로 20년간 차 감독을 피해다녔다'고 고백했다. 지난 6월 21일 방송된 블랙하우스 20회차에서 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차 전 감독 – 글쓴이)한테 정말 죄송해서 무릎 꿇고라도 사죄를 드리고 싶은데 앞에 나타나질 못하겠더라고요. 한번 빨리 뵙고 싶은데 그게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한 번 빨리 뵙고 싶다는 하 감독의 바람은 20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아마 멕시코전 역전패의 빌미를 줬다는 자책감이 하 감독을 괴롭힌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하석주 감독과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의 재회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하 감독을 다독이는 차 전 감독의 모습은 감동을 더했다. 녹색 그라운드를 거침없이 누비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 속은 참으로 여렸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비단 감동만 있었던 건 아니다. 차 전 감독과 하 감독, 그리고 최 전 감독은 선수를 비난하는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 러시아 월드컵 스웨덴과의 첫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내준 김민우, 그리고 멕시코전 페널티킥 반칙을 범한 장현수는 팬들의 비난에 시달렸고 두 선수의 소셜 미디어 계정은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만약 1998년 당시 소셜 미디어가 있었더라면 하 감독과 차 전 감독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독일 출신 클라우스 클라분데는 한국전 패배에 속상해 하면서도 '선수들을 비난하는 문화는 없다'고 했다. 참으로 새겨 들어야 할 지적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책임 없나 

이 지점에서 대한축구협회는 잘못이 없는지 묻고 싶다. 지난 일을 들추는 게 부질 없어 보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복기는 필요하다. 네덜란드와의 경기 이후, 축구협회가 계속해서 차 감독을 신임했다면 어땠을까? 이후 경기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하 감독이 마음의 짐을 느껴 20년간 차 전 감독을 피해 다니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차범근은 말 그대로 불세출의 축구 스타였다. 후배 축구인이 단 한 번의 실수로 귀감이 될 선배 축구인과 관계가 단절됐다는 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축구협회는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 절차를 진행 중이다. 신태용 현 감독도 후보로 올라 있다. 차 전 감독이나 하 감독, 최 감독 모두 신 감독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독일축구협회는 훌륭한 참고 사례가 될 것이다. 독일은 80년 만에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독일축구협회는 현 요하임 뢰브 감독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대회 중 감독을 해임시킨 대한축구협회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축구협회의 차 감독 해임은 본인에게나 하 감독은 물론, 당시 축구팬에게도 큰 생채기를 남겼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이런 차 전 감독과 하 감독의 재회를 성사시켰다. 제작진의 기획은 두 사람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치유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시사 프로그램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난 사실 진행자 김어준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김어준은 사회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음모론을 꺼내들었다. 또 한창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을 때 정 전 의원에게 기울어진 방송 내용으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같은 시간대 JTBC가 방송하는 <썰전>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시사 프로그램으로선 보기 드물게 '힐링'하는 경험을 출연자와 시청자들에게 전해줬다. 김어준 MC와 <블랙하우스> 제작진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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