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tvN 새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첫방송됐다.

22일 tvN 새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첫방송됐다.ⓒ tvN


이미 지난 5월 17일에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다시 한 번 곱씹고 싶다. <미생> <응답하라 1998>의 계보를 잇는 수작이기에 그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고 시청률에 비해 많은 애호가를 남긴 작품이기에 두고두고 파장을 남기리라는 예측이 들기도 한다. 한편, 어린 여성과의 이성교제를 로망 하는 남성들의 삐뚤어진 성의식을 비롯한 각종 논란도 끊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한 회도 빠짐없이 본방사수로 즐겼다. <나의 아저씨>는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긴 <미생>과 <응팔>의 빈자리를 메꾸어 주며 헤어 나올 수 없는 공감의 장으로 나를 끌어 들였다.

이 드라마를 수작으로 꼽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름 끼치게 섬세한 현실묘사를 통해 인간성 회복에의 깊은 성찰을 이끌어 냈으며 평범한 이들의 삶 속에 내재한 철학과 미학이 깊이 있는 감칠맛을 더했다.

둘째, 동훈과 지안이라는 주인공들의 캐릭터 매칭이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동훈을, 그리고 지안을 더는 다른 인물로 상상하기조차 어렵게 했다. 그들은 그간 보아온 이선균과 이지은이 아니었다. 그들 본래의 모습이 다른 매체를 통해 나올 때면 오히려 낯설어 고개를 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두 인물과 배역의 매칭이 드라마의 중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드라마 완성도의 반은 차지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꼭 맞는 옷이었다.

셋째, 다소 낯선 조역들의 거칠거칠한 연기마저도 흡인력 있는 연출로 녹여내어 주인공과 조역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살아있는 묵직한 캐릭터들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러나 끝내 눈 감아 주기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의 나이 격차를 비롯하여 과도한 폭력, 범죄의 미화, 양성 불평등 시각 등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직하게 이어 나갔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더 크고 중요한 의미로 귀결됨으로써 아름답고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며 박수갈채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첨예한 경계들에 치여 잔뜩 움츠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 속에 깊은 연민과 뜨거운 인간애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따뜻한 치유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내내 허리춤에 찬 전대에 손을 대고 야바위꾼의 놀음을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드라마가 가진 문제적 요소들이 선명한데, 뭔가 정신 줄 놓고 구경하다보면 내 전대의 돈이 다 야바위꾼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니, 어느 지점에서는 차라리 속아버리고도 싶었다.

내가 목격한 <나의 아저씨> 속 문제적 요소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 장면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 장면ⓒ tvN


내가 발견한 문제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성인 남성과 어린 여성에 대한 이성 관계구도는 엄연히 의도된 것이다. 드라마 안에는 수많은 연민의 대상들이 있지만 동훈은 유독 지안(이지은 분)에게 너무나 깊게 이입하고 과하게 행동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의혹을 세련되게 따돌리면서도 의미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발목이 드러난 짧은 양말에 낡은 운동화를 신은 지안의 발을 내려다보며 동훈(이선균 분)은 말한다. "추운 겨울에 발목이 드러나는 양말을 신는 건 왜지? 섹시하다고 생각하나?" 동훈이 지안과 술 한 잔 하던 술집에 들어서서 지안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술집 주인에게 묻는다. "전에 저랑 같이 왔던 그 애 혹시 안 왔나요? 왜 그 예쁜 애..." 드라마 감독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애를 그리고 싶다고 밝히면서도 굳이 '섹시함', '예쁜 애' 등을 언급함으로써 굳이 남녀관계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잠재우지 않는다. 시청률과 비판여론 잠재우기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노련한 사냥꾼이다.

둘째, 폭력과 범죄의 미화이다. 드라마 속 피해의식은 주로 폭력으로 대처된다. 특히, 혈연이나 지연으로 맺어진 연대의식은 과한 감정이입으로 갈등의 주체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처해나가기 어려울 만큼 온통 뒤얽히기 일쑤이다. 40대 중반의 주인공과 그 가족들은 각각의 삶 속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매몰되어 있으며 끈끈한 지역사회의 연대 또한 따뜻한 인간애과 집단이기주의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든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점은 지안의 도청에 대한 미화이다. 지안은 범죄를 목적으로 동훈의 휴대폰에 도청 프로그램을 심고 도청을 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동훈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동훈이 더 이상 적이 아닌 같은 편이 된 이후에도 도청은 계속된다. 동훈의 편에 선 지안은 도청을 통해 그를 더욱 더 연민하고 지지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뜨거운 눈물로 함께한 명장면 중 많은 장면들이 도청 상황에서 벌어진다. 도청을 통해 그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게 된다면 도청을 당해도 좋을까? 이 세상 그 누가 나를 도청해도 상관이 없을 수 있을까?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끔찍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 또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가히 천재적인 연금술사이다. 특히, 도청은 연금술사의 가장 효과적이고 참신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는 점은 심지어 두려운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최소한 19금이었어야 한다.

셋째, 드라마의 인물, 이야기, 주제 그 모든 것을 한 코에 꿰고 있는 남성 중심 구조가 가장 불쾌한 문제적 요소이다. 동훈의 아내, 윤희(이지아 분)는 바람을 피운다. 상대는 하필이면 세상 착한 동훈의 숙적인 도준영(김영민 분)이다. 그럼으로써 윤희의 외도는 그 누구도 연민할 수 없는 완벽범죄가 되고 만다. 극중 인물들도 시청자들도 그녀를 연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윤희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이고 착한 남편과 인간미 넘치는 시댁 가족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여왕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그녀는 외로웠다. 남편은 결혼 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도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최우선으로 인식하며 윤희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형제들이나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윤희의 곁을 비우기 일쑤였다.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tvN


결혼은 했지만 마음은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형제, 친구들의 대리 만족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서늘한 결혼생활이었다. 드라마는 그런 윤희가 동정 받을 수 없는 단단한 장치를 마련해두고 동훈의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더군다나 윤희 자신마저도 스스로를 맹렬히 비난하고 동훈의 어떠한 처분에도 순응하리라 결심한다. 동훈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지안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돕는 것으로 속죄하기도 한다. 잔인할 만큼 남성의 입장에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 동훈의 형 상훈(박호산 분)과 동생 기훈(송새벽 분)은 지안의 존재를 의식했을 때 분명 들떠 있었다. 젊은 여자애와 동훈 사이에서 뭔가 썸이 생기나보다 즐거워하고 부러워했다. 그랬던 그들이 윤희의 외도를 알게 되자 동훈보다 더한 분노와 슬픔을 드러냈다. 적어도 한 드라마에서 나란히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염치없는 장면이 아닌가 하는 불쾌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 회에서 보여준 빈집에 홀로 남아 지안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동훈의 모습을 통해 내심 동훈과 지안의 관계를 지지하는 여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범죄자 윤희에게 상처받고 회복이 결코 쉽지 않아도 되는 동훈, 그 아저씨의 승리이다. 동훈은, 그리고 자신의 성불을 위해 일방적으로 정희를 떠나 정희에게 있어 평생의 한으로 남은 겸덕(박해준 분)은 소위 말하는 대의명분을 위해 윤희를, 그리고 정희(오나라 분)를 희생시킨 것일까? 이 지점에서 소위 큰일 한다는 사람들의 변명거리로 남용되는 '대의명분'이라는 표현에 대해 조소가 번지는 것을 멈추기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다뤄진 사랑은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다. 여러 인물들이 결혼을 통해 독립한 이후에도 원가족의 욕구에 지나치게 이입하고,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가족이라는 개념마저도 남성의 혈육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동훈과 지안, 두 남녀의 서로에 대한 사랑 또한 자기연민에 의한 과도한 감정의 매몰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따뜻하고 깊은 인간애를 말하지만...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tvN


드라마는 끊임없이 따뜻하고 깊은 인간애를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한다. 결국 과거의 남성중심 사회로의 회기를 꿈꾸는 기성세대 남성의 욕망이 너무나 잘 만들어진 드라마적 기술 속에서 세련되게 주입되고 있다. 그러나 긴 여운만큼이나 다양한 감상평을 남긴 후기를 접하면서 나는 더 큰 괴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어떤 드라마가 이렇게 손쉽게 수많은 남녀노소를 한 순간 착하고 순수한 어린이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서 기성세대 남성의 욕망마저도 이 사회가 품은 욕망을 위해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드라마 속 수많은 갈등의 해결자는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지안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 동훈은 홀로 혈기 왕성한 20대 사채업자, 광일(장기용 분)을 찾아가 목숨을 건 몸 싸움을 벌인다. 청각장애에 노환까지 겹친 노조모(손숙 분)를 어린 지안이 책임진다. 그 처지를 알고 기관의 도움을 받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지안은 동훈에게 구원받기 시작한다.

40이 넘은 두 실업자 아들은 노모의 집에 얹혀 따신 밥을 먹고 산다. 동훈이 광일에게 맞은 사실을 알고 후계동 주민들은 전투태세로 가해자를 찾아 나선다. 무일푼 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훈의 형, 상훈은 청소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지안으로 하여금 폼 나는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준다.

어머니의 한없는 희생, 가족의 기대 속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가장의 희생, 한 남자의 뿌듯한 삶을 완성하기까지 모든 걸 감내하는 아내의 희생, 그리고 손녀, 이웃... 이 모든 것의 뒤에 미풍양속으로 둔갑한 무책임한 사회의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삶이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도 구성원의 인정과 희생에 기댄 교화와 감독의 기능에서 개인의 부족을 채우고 보완하는 보호체제로 달라져야할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기성세대에게 있어 익숙한 사회의 기능은 우리의 무지함을 일깨우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를 계도하는 감독자로서의 기능이다. 그러다보니 이 드라마의 어법은 너무나도 친숙하고 구미에 착 감긴다.

하마터면 만만치 않은 오늘의 나의 삶에 급급할 뻔한 우리를 아주 능숙하게 회유하고 달랜다. 어느새 우리 모두 순한 양이 되어서 "그래, 그때가 좋았어"라고 읊조리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개인들은 얼마나 많은 희생들을 감내했던가. 우리의 삶은 이미 나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버거운 온갖 촘촘한 갈등구조에 둘러싸여 있다. 나를 지키는 것만이 최선인 상황을 얼마나 많이들 경험하고 있는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니 사회의 보호를 받을 차례라고 말하는 개인들에게 <나의 아저씨>는 말하고 있다. '예전이 좋았지 않느냐고, 그게 진짜로 살아가는 맛이라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타이르고 있다. 여기까지 느꼈을 때 내 마음 속에서 <나의 아저씨>라는 제목은 <그저 꼰대>로 둔갑한다. 야바위꾼의 화려한 손기술은 딱 여기까지이다.

덧붙이는 글 본인의 페북 포스팅 글(친구공개)의 일부 내용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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