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적 에로스 포슽
극사적 에로스 포슽서울환경영화제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 일본영화 특별전에서 상영하는 하라 카즈오의 <극사적 에로스>(1974)는 하라 감독이 그의 전 연인 미유키에게 보내는, 애절하면서도 파격적인 연서(love song)라 할 수 있다.

1972년, 미유키는 함께 살고있던 카즈오에게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오키나와에 가겠다고 선언한다. 미유키를 놓치기 싫었던 카즈오는 그녀가 살고 있는 오키나와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 미유키에 관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키나와에서 살기로 맘먹은 미유키는 여러모로 남다른 여성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을 꾸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미유키는 전통적인 가족을 배격하고 피하고자 한다. 미유키가 오키나와로 건너간 것 또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그녀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오키나와에 들어선 미군기지는 지역 윤락업을 번창시키고, 유흥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오키나와로 건너간 미유키는 자신처럼 홀로 아이를 키우는 동성 친구와 공동체 생활을 꿈꾸지만, 친구에게 미군 병사 애인이 생김으로써 미유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혼혈아를 낳고 싶었던 미유키는 그녀의 바람대로 흑인 병사와의 임신에 성공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오키나와이지만, 자발적 미혼모를 희망하는 미유키는 그 사정이 조금 달라 보인다. 임신을 하고 흑인 병사와 헤어진 미유키는 윤락업에 종사하는 오키나와 여성들과 교류하며 그녀의 아이들을 도맡아 키우는 등 활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이내 오키나와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미유키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원래 살던 도쿄로 돌아간다.

자발적 미혼모 미유키의 나홀로 출산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 <극사적 에로스>(1974) 한 장면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 <극사적 에로스>(1974) 한 장면 서울환경영화제

<극사적 에로스>의 대표적인 장면은 역시 미유키의 출산 장면이다. 누구의 도움없이 혼자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바람을 비췄던 미유키는 그녀의 계획대로 자가 출산에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가 출산 경험을 바탕으로, 카즈오의 아이를 임신한 고바야시 사치코의 출산을 도와준다. 자신과 관련된 두 여성의 출산을 카메라로 찍기만 할 뿐인 카즈오는 이 상황에서 철저히 관찰자 혹은 방관자로만 남는다. 다소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미유키의 출산 장면이 자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숭고한 과정이기도 하나,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미유키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대목 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보람을 느끼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기를 거부하는 미유키는 출산 이후 여성 공동체를 조직하여 자신과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여성들이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생활을 꿈꾼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예뻐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들과 같겠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기존의 어머니상을 거부하는 미유키는 공동 육아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생활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 <극사적 에로스>(1974) 한 장면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 <극사적 에로스>(1974) 한 장면서울환경영화제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시네마 베리테' 양식을 취하는 <극사적 에로스>는 연출자인 하라 카즈오와 그의 새 연인이자 영화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사치코가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전 연인, 새 연인으로 얽힌 세 사람의 관계는 자신들의 내밀한 삶을 담은 영화를 공동으로 완성하며 어느정도 마무리 된다.

미유키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카메라를 들었던 남자 카즈오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삶을 살고있는 미유키의 앞날을 응원하며 그녀를 놓아주기로 마음 먹는다. 남성중심적 가부장 가족문화를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여성과 그 여성의 행보를 카메라로 묵묵히 담으며 지지하는 남성이 보내는 지극한 연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고 앞으로도 기억될 시대의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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