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배우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방송 시간은 정말 금·토요일 오후 11시일까? 다수의 시청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해당 시간에 본방송을 보겠지만 일부 시청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예쁜 누나>의 본방송 시간은 금요일 오전 10시 20분이다. 물론 이 시간은 해당 드라마의 재방송 시간이기도 하지만 시각장애인용 화면해설이 제공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화면을 볼 수 없는 (혹은 화면이 제한적으로 보이는) 시각장애인들에게 화면의 장면이나 자막 등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화면해설방송은 보다 원활한 프로그램 이해를 돕는다.

 화면해설 성우가 화면해설방송에 들어갈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다. 화면해설방송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화면의 장면, 자막 등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방송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돕는다. (장애인방송 프로그램 제공 가이드라인 참고)

화면해설 성우가 화면해설방송에 들어갈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다. 화면해설방송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화면의 장면, 자막 등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방송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돕는다. (장애인방송 프로그램 제공 가이드라인 참고)ⓒ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한 남자가 피투성이 얼굴로 힙겹게 눈을 뜬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듯 자동차 유리 파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의 눈 앞에 과거의 일이 교차한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자신이 명품 손목시계를 차는 모습. 붉은색 패턴의 명품 넥타이를 골라 착용하고 넥타이핀을 꽂고 거울을 보는 자신의 모습. 남자가 탄 전복된 승용차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파손된 흔적이 사라진다. 승용차는 멀쩡한 모습으로 도로를 달린다. (음악)'

KBS에서 현재 방송 중인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의 화면해설방송 일부다. 화면해설방송은 이런 식으로 화면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화면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방송법에 따라 전체 방송 프로그램 중 지상파 10%, 위성방송 7%, 종합편성채널 10% 등 화면해설방송 비율을 준수해야 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불친절한' <황금빛 내 인생>

 SBS <리턴>의 상승세가 무섭다.

SBS <리턴>도 화면해설방송 마지막 회가 제공되지 않았다.ⓒ SBS


방송사들은 '비교적' 화면해설방송 비율을 준수한다. 하지만 단순히 비율만 준수하다보니 황당한 일도 발생한다. 드라마 중간에 화면해설방송을 중단하기도 하는 것. 2018년에도 다수의 드라마들이 마지막회 이전까지 화면해설을 제공하다가 돌연 화면해설방송을 편성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MBC 주말 드라마 <돈꽃>은 최종회를 포함해 2회차가 제작되지 않았고 <데릴남편 오작두>의 경우 짝수차만 화면해설방송이 제작되기도 했다. SBS <리턴> 역시 중간 회차가 숭숭 빠진 채로 화면해설방송이 진행되어야 했다. 드라마를 챙겨보던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드라마의 진행 상황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화면해설방송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단적인 예다.

또 새벽 2시에서 5시 사이에 화면해설방송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경우 드라마가 종영(1월 18일)한 5일 뒤부터 화면해설방송 1부가 시작됐는데(1월 22일) 그마저도 새벽 5시나 6시로 편성됐다. 과연 새벽 5시에 일어나 이 드라마를 볼 여력이 되는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있을까. 비장애인들의 경우 새벽 시간대 방송되는 프로그램도 '다시보기' 서비스 등을 이용해 편한 시간에 다시 볼 수 있지만 공영방송 KBS와 EBS를 제외한 타방송사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화면해설방송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장애인들 역시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저녁시간대(오후7시~10시)에 방송을 접하곤 하는데(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2014년 장애인 방송 활용 실태 및 만족도 조사') 이 시간대 화면해설방송을 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 방송이 시각장애인들이 원하는 방송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다수가 원하고 인기 많은 프로그램을 화면해설방송으로 볼 수 없다는 건 화면해설방송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가장 큰 저해 요소다. 지난해 47.5%로 기록적인 시청률을 남긴 채 종영한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도, 10년 넘게 장수하며 예능의 새 역사를 썼던 <무한도전>도 화면해설방송이 따로 제공되지 않았다.

 KBS는 일부 프로그램이나 자사 홈페이지-KBS ABLE(장애인 서비스)를 통해 화면해설방송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KBS는 일부 프로그램이나 자사 홈페이지-KBS ABLE(장애인 서비스)를 통해 화면해설방송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KBS


어떤 프로그램을 화면해설방송으로 제공할지는 방송사의 사정이나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10명 중 9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불편해도 화면해설이 제공되지 않는 방송을 택하는 이유다.

"화면해설방송 질 떨어져"

과거 한 기관에서 화면해설 모니터링 업무를 했다고 말한 시각장애인 조현대씨는 "일단 본방송에 화면해설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체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화면해설방송은 오전과 이른 오후로 집중돼있고 그마저도 몇몇 프로그램에 한한다는 것. MBC 예능 중 최근 가장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전지적 참견 시점>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도 화면해설방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TV와 시각장애인들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사실 요즘 조현대씨는 TV를 자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부터 국내 화면해설작가 1호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장현정 작가 또한 "제일 큰 문제는 화면해설을 사용하시는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화면해설방송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가 형편대로 방송할 프로그램을 선정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러 장벽을 넘어 어렵게 화면해설방송을 찾아서 듣는다고 해도 방송의 질이 걸린다. 조현대씨는 "화면해설방송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막상 화면해설방송을 듣고 있으면 필요한 곳에서는 해설이 나오지 않고 필요 없는 곳에서는 해설이 나오는 등 화면해설방송의 질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토로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시각장애인들이 상상의 나래를 펴는 부분이 있다. 드라마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산책을 하면 물소리도 나고 새소리도 나고 대사도 오고가고 숨소리도 나는 등 사랑 표현에 느낌이 실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화면해설을 한다. 산통을 깬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차라리 화면해설방송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화면해설방송의 질적 충족은 어떻게 가능할까? 결국 화면해설 대본을 쓰는 방송작가의 전문성에 기대야 하는데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일단 화면해설방송 전문 작가가 한국에 많지 않고 또 전문 작가를 기르는 데 충분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2년 장애인방송의 강제 비율 할당 등 관련 고시가 제정된 이후 방송사는 화면해설방송 전문 작가를 따로 기용하지 않고 화면해설방송을 자체 제작하거나 저가의 비용으로 화면해설방송을 만드는 업체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비율이 정해졌으니 화면해설방송을 하는 프로그램과 업체들은 늘었지만 그만큼 질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홈페이지를 통해 화면해설방송이 언제 제공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홈페이지를 통해 화면해설방송이 언제 제공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홈페이지


1999년도부터 화면해설작가를 양성해 현재 화면해설방송의 약 70% 가량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무엇보다 1) 화면해설 전문 작가를 양성하기 위한 업체들의 노력과 2) 화면해설방송본에 대한 시각장애인들의 피드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현정 작가는 "시각장애인의 기준으로 화면을 볼 줄 아는 전문 작가가 화면해설방송 대본을 써야 한다"며 "제작 가격을 인하하고 화면해설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저급의 화면해설 방송을 만드는 건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황덕경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장은 "제작비가 없어 장애인 방송의 질을 높이지 못한다는 건 궁색한 변명"이라고 지적한다. 황덕경 센터장은 "지상파 장애인 방송 화면해설에 매년 3억 5천만원 정도의 제작비가 드는데 이 비용이 없어서 화면해설방송을 적용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스타 배우의 경우 드라마 한 편 출연료가 억 단위다"라고 비판했다.

황덕경 센터장은 장애인 방송이 가장 잘 정비된 영국의 사례를 언급했다. 영국의 경우 화면해설방송(지상파)의 강제 할당 비율이 한국처럼 10%에 불과하다. 그러나 BBC는 자발적으로 화면해설방송의 비율을 32%로 유지하고 있다고 황 센터장은 말한다. 황 센터장은 "3개월 전 영국 BBC에 다녀와 어떻게 32%까지 화면해설방송의 비율을 자발적으로 올리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왜 안 되냐'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잘 하면 좋은 게 아니냐'고 답하더라. 그때서야 비로소 이것이 인식의 문제이구나 싶었다"고 언급했다.

방송통신위원회 산하의 시청자미디어재단에서 장애인방송 정책을 총괄하는 이재원 선임은 "장애인 방송의 질적 부분에 대해서 장애인 단체에서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왔고 2017년 말에 시청자미디어재단에서 비로소 장애인 방송 프로그램 제공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어 "장애인 방송의 경우 한국은 2012년에 고시가 만들어졌는데 이전에는 장애인 방송 후진국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6년만에 양적인 부분에서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제 질적인 개선을 가져가자는 게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KBS 드라마 '퍼펙트 센스'(2016). 1부작 짜리 드라마로 지난 2016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맞춰 편성됐다. 수영은 드라마에서 시각장애인 교사 역할을 맡았다.

시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KBS 드라마 '퍼펙트 센스'(2016). 1부작 짜리 드라마로 지난 2016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맞춰 편성됐다. 수영은 드라마에서 시각장애인 교사 역할을 맡았다.ⓒ KBS


이어 이씨는 "국민 의식의 차이도 있어 조금씩 인식 개선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다수의 시각장애인들과 관련 단체들이 원하는 것처럼 본방송 시간에 화면해설방송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드라마 제작 환경의 변화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씨는 말한다.

"어떤 회차는 방송화면해설이 있다가 어떤 회차는 없었던 경우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았다. 방송사업자가 쪽대본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방송되기 직전까지 편집을 하느라 화면해설을 입힐 시간이 없는 거다. 한시간짜리 방송의 경우 화면해설방송을 입히는데 보통 하루 정도가 소요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장애인 방송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화면해설을 제작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드라마 사전 제작이 정착되면 더 좋다. 또 화면해설 작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장애인 방송의 질은 높아질 거라고 본다."

당장 올해 안에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가 일부 개정될 예정이다. 해당 고시에는 화면해설방송의 편성 비율 목표치 등이 제시되어 있다. 시청자미디어재단은 "지금까지 주로 장애인 방송이 양적인 부분에서 그 목표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민했다면 이제는 질적인 부분을 위주로 고려해 개정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전했다.

화면해설방송의 질적인 부분은 유승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방송법 일부개정안을 통해 개선할 계획이다. 유승희 의원은 지난 4월 12일 방송법 개정안에 방송사(업자)가 화면해설방송이 포함된 장애인방송 관련 용역 계약을 체결할 시 방송 품질 보장을 위해 '기술 능력'과 '수행 실적'을 고려해야 한다는 항목을 넣었다. '기술 능력'이나 '수행 실적'이 비록 추상적이긴 하나 장애인 방송의 질적 측면을 법적 고려 사항으로 언급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유승희 의원은 "장애인 방송 중 특히 화면해설방송의 경우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개정안이 통과돼 장애인 방송의 품질이 개선되고 시청권 보장에도 기여하길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유승희 의원실은 지난 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번 방송법 일부개정안에서는 장애인 방송의 방향을 잡았고 좀 더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장애인 방송 프로그램 제공 가이드라인을 수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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