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을 그린 독립영화 <지슬>
영화사 진진
영화는 군인들의 잔혹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 사건이 벌어진 정치척 배경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대부분 간접화법으로 드러난다. 연기 자욱한 동굴에서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몽환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간접화법은 오히려 사건의 잔혹함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동족에 의한 잔혹한 학살행위가 이 땅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전반적인 구성은 많이 아쉽다. 4.3 사건을 드러내 줄만한 요소가 죄다 잘려 나간 느낌이 들어서다. 제주 출신의 연출자는 자라면서 고향의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지 모른다. 이에 4.3사건의 전후맥락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을 배치했다면 더 큰 공감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고 본다.
아마 영화의 진정한 의도는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치유인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을 제사용어인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등 네 단락으로 나눈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한국전쟁 축소판이었던 제주 4.3 앞서 적었듯 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의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구성에 격렬히 저항했다. 제주도민들의 저항이 격했던 건 교육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4.3 당시 소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은 제주도가 가장 높았다. 이와 관련,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은 지난 3월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주 평화기행단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4.3을 탄압한 건 제주도민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저항을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다뤘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는 미소 냉전구도가 본격화되던 시점이었고, 이 같은 정세는 미군정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다. 미 군정 당국은 잠재적 적대세력이 제주도민들의 봉기를 선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속내를 간파하고 '시그널'을 보냈다. 1949년 1월 2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미국의 냉전전략과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뭍에서 온 군인들, 그리고 서북지역(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열혈 기독교 신봉자가 주축인 '서북청년회'(서청)는 거리낌 없이 잔혹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서청의 잔혹행위는 가공할 정도여서 국내는 물론 국외 연구자들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서청의 잔혹행위가 이슬람국가(IS)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또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란 책에서 서청의 만행을 자기혐오, 그리고 극단적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미군정의 내부 기밀 보고서에서 이 집단은 흔히 남한 전역에서 테러를 자행한 파시스트 청년단으로 묘사되었다. 단원들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이었고, '청년'은 10대부터 중년까지 고르게 분포한 악한들이었다. (중략) 예를 들면 하귀리 마을에서는 남편이 반란자로 추정되는 스물한 살 된 임신부 문씨는 집에서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창으로 열세 번 찔려 유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반쯤 나온 상태의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여인들은 흔히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 뒤 질 안에 수류탄을 집어 넣어 폭발시켰다. 이 병리 현상은 아마도 이전에 일본에 복종했고 이제는 다른 외세(미국 - 글쓴이)를 위해 활동하는 자들의 자기혐오, 그리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혐오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이렇듯 제주 4.3은 해방 이후 모순이 집약된 비극이었고, 이 같은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제주 4.3을 한국전쟁의 전주곡이라고 규정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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