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구성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또는 '기승전결'을 다른 콘텐츠들에서도 그대로 발견하는 일은 이제 식상하다 못해 '능력 부재'로까지 느껴진다. 끊임없이 새롭고 참신한 걸 원하는 이 시대에 형식의 파괴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보수(변하지 않는 것)'에 가깝고 익숙한 게 편한 인간의 성향에 부합하는 건 오래 전부터 내려온 구성과 형식이다.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최고의 화두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는 샛길로 새면 안 되는 성역이다.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이 열연한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는 당사자는 아니지만 홀로코스트와 가장 위험하게 연관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 동물에 대한 무한 애정도 포함돼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통적인 구성 방식을 정확히 따른다. '평화-위기-위기 속 평화-파멸에 가까운 상황의 연속-모든 걸 되돌려 놓은 결말'.

홀로코스트 당시의 위대한 이야기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운이 조금씩 감돌며 전쟁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직전이다. 안토니나 자빈스키(제시카 차스테인 분)와 얀 자빈스키(요한 헬덴베르그 분) 부부는 바르샤바 동물원을 운영한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에는 이 부부의 동물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구성원들을 향해 불어넣는 활기, 자비가 함께 한다.

어느 날 이미 감지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무섭게 현실로 다가왔다. 동물원은 파괴되고 동물들이 도망가거나 죽는다. 가까스로 재건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물학자 루츠 헤크 박사(다니엘 브륄 분)가 히틀러 수석 동물학자의 신분으로 바르샤바 동물원에 온다. 동물원을 무기고로 사용하려니 희귀 동물들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루츠가 이 부부에게 '적(敵)'이라는 게 확실해진 가운데 모든 유대인들을 게토로 강제이주시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개중에는 물론 자빈스키 부부와 마음을 나눈 친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 명만 지하실에 숨겨주기로 하지만 유대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들. 돼지 사육장을 차린 후 게토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돼지에게 준다는 명목 하에 게토로 들어가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300여 명의 유대인을 숨겨주고 탈출시켜준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 자빈스키 부부는 익히 알려져 있다. 1993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진 쉰들러가 단번에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동물을 향한 사랑과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과 페미니즘이 함께 한다.

그동안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시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수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주제다. 그걸 영화로 치환하면, 안타깝게도 '클리셰'가 되기 일쑤다.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은 보고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는 적어도 나에게 그때그때 다른 소회를 남긴다. 끔찍함,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포 등. 분명 클리셰 '이상의' 진부함을 선사하지만 클리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맥락에 서 있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영원히 가슴 속에 담아두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주키퍼스 와이프>에서의 홀로코스트는 참으로 담담하다. 영화 전체의 잔잔함을 뛰어 넘는 담담함인데 핍박 받는 유대인을 향한 위로의 차원이다. 하지만 강제 이주 당해 죽음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유대인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땐, 그 잔잔함과 담담함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이는 곧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과 불의를 향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핀다.

동물이 곧 가족이고, 가족이 곧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곧 핍박받는 모든 이들의 대변자라고까지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미친다. 그 자비의 손길은 모든 것에 뻗치는데, 그 시작이 다름 아닌 동물이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보아 왔던 홀로코스트와 상당히 다른 결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동물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까지


영화는 이와 함께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동물원이 주배경인 만큼 동물이 주된 소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리 중요한 소재는 아니다. 루츠 박사가 자빈스키 부부, 특히 안토니나에게 접근하는 도구 정도로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안토니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구 정도.

심지어 동물은 페미니즘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까지 쓰인다. 희귀 물소의 암컷과 수컷을 강제로 교미를 시켜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루츠 박사의 우생학 발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당연한듯 버려진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불안한 안위에도 불구하고 그 새끼를 챙긴다.

'밖'에서 피말리는 작업을 하는 얀은 "'안'에서 쉬운 일이나 하고 루츠와 놀아나기까지 한다"며 안토니나를 구박한다. 이 모습에서도 페미니즘의 단면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급한 시기에 안과 밖을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인가. 바깥 일 못지않게 안토니나는 안에서 피말리는 작업을 계속한다. 또 안토니나가 루츠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얀도 어쩌지 못하는 루츠의 강력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생각거리 또는 소재와 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화해 선보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성공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몇몇 장면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장면으로 그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에 부정적 시선을 던질 이유는 없다. 최고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악과도 거리가 먼, 한없이 보통에 가까운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그저 보고 그저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