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1984) 포스터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1984) 포스터 ⓒ Cinesthesia 프로덕션 주식 회사




[하나] <천국보다 낯선>(1984)

우리 모두 무언가를 기대할 때 그것이 조만간 '천국'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 걷던 우리는 막상 당도한 곳이 "천국보다 낯선" 어딘가라는 사실에 실망하고는 한다. 미국의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대표작 <천국보다 낯선>은 방황하는 세 인물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세 명의 주인공들(에바, 윌리, 에디) 또한 미래를 찾아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왔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하다. 작품을 갈라놓는 세 가지 소제목 '신세계', '1년 후', '천국'은 이러한 현실의 진행 과정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국보다 낯선>에서의 1막 <신세계>는 헝가리에서 이민을 온 "윌리"라는 인물의 뉴욕 원룸을 비추며 시작한다. 윌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사촌 "에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에바"가 자신의 원래 목적지인 클리블랜드로 가기 전에 열흘 정도만 묵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윌리와 에바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그녀는 그렇게 열흘이 지나 떠나버린다.

2막 <1년 후>에서는 포커에서 돈을 딴 윌리가 자신의 친구 에디와 함께 1년 전에 떠나버린 에바를 찾아가게 된다. 에바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다시금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윌리와 에디 또한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떠나게 된다. 1막의 에바처럼 말이다.

3막 <천국>에서는 집에 돌아가려던 윌리와 에디가 에바와 함께 즉흥적인 플로리다 여행을 떠나게 된다. 플로리다에서의 멋진 풍경을 기대했건만, 그들의 생활은 같이 한집에 살던 때와 변함이 없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윌리와 에디는 도박을 하러 떠나고, 돈을 잃게 된다. 두 남자가 집을 비운 사이에 무료함에 시달리던 에바는 해변으로 향해 산책을 즐기던 중, 자신을 타인으로 착각한 낯선 이로부터 큰 액수의 돈뭉치를 받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에바는 그중 약간의 돈만을 남긴 후 짐을 챙겨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두 남자는 에바를 붙잡기 위해 공항으로 떠난다. 공항에서 에디는 자신이 에바가 탄 비행기에 타서 그녀를 붙잡을 테니 윌리는 이곳에 있으라고 말하고 떠난다. 그러나 에바는 내일 비행기를 타기로 했고, 셋이 함께 있던 여행지의 모텔로 돌아와 있다. 윌리는 여전히 공항에 있다. 에디는 비행기에 있다.

윌리와 에바는 같은 이민자 출신이지만 에디는 출신지가 불분명하다. 윌리가 처음부터 자신의 태생을 부정했던 것처럼, 에바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살게 되었지만 결국 고향으로의 비행기 표를 붙잡아 든다. 두 인물의 차이는 그것이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부정하게 된 자와 결국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자의 차이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신대륙처럼 베일에 싸여있다. 옛 서부의 골드 러쉬처럼 새로운 어딘가로 향하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바쁜 발걸음이 향한 곳에 찬란한 금빛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황량한 모래 먼지뿐이다.

그런 면에서 다시금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모텔로 돌아와 모텔 안의 물건들을 어루만지는 에바의 행동은 애잔하다. 미래를 포기하고 과거로 다시 떠나기 전, 자신이 버티어냈던 현실의 물건들에 대한 미련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에바가 현실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세 인물 간의 차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 중에서 모두 무료하고 따분하게 묘사되는 세 사람 간에는 돈을 얻는 방법에 대한 차이가 있다. 윌리와 에디는 도박을 즐기지만, 에바는 햄버거집에서 일한다. 도박은 확률적인 행위이다. 큰돈을 얻고 큰 위험이 따른다. 큰돈을 잃을 수도 있고, 쉽게 벌고 쉽게 빠져나간다.

즉,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는 행위이다. 반대로 아르바이트는 가장 확실하지만, 돈을 평범하게 버는 방법이다. 쉽게 벌어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에바는 두 남자에 비해 미래에 대한 준비가 확실했으나, <천국>에서 우연히 얻어진 큰돈으로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 불확실한 미래와 안주하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다가간 <천국>은 예상치 못한 기회를 주는데, 그동안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던 에바는 그 돈을 미래에 투자하지 않고 과거로의 회귀에 사용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준비하던 것에 박혀있던 현재에 미련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도박은 불안정한 행위이고 아르바이트는 비교적 안정적인 행위이기에 불안정한 것이 안정적인 것을 붙잡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미련 없이 도박하는 두 남자는 에바에 비하면 한심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놀고먹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에바보다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왜 에바보다 행복해 보일까? 그들은 에바가 큰돈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공항까지 달려가 붙잡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안주하던 자가 안주하지 못하던 자에게 <천국>에서 기회를 붙잡게 해주고, 안주하지 못하던 자는 다시금 현실로 안주하려 한다. 고향을 떠나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정착한 윌리는 이미 뉴욕에서의 생활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에바에게 미국이란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미래 그 자체에 불과했고, 그녀의 현실은 고향에 있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현실에 가장 착실하게 살던 사람은 에디와 윌리이다.

에바에게 찾아온 큰돈은 일종의 기회다.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미래로 향하는 길목에 놓아둘지 아니면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지는 개인에 달려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돈이 향하는 곳은 본래 미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여태까지 희망찬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이 <1년 후>를 통해 따분하고 무료한 현재가 되었고, 그로 인해 다시 자신이 원래 향하던 목적지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둘 중 어떤 해석을 지지하든 간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덧붙여서, 비행기를 타서까지 에바를 붙잡으려던 에디의 행동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친구의 사촌에 불과한 인물을 위해 비싼 비행기 표를 구매해 망설임 없이 탑승하다니. 게다가 에디는 윌리와 깊은 사이도 아니다. 신대륙에서 만난 친구일 뿐이다. 에디는 왜 그랬을까?

에디는 윌리가 미래를 향해 가던 도중 만난 동료이다. 동시에 윌리의 여정에 끼어든 예상치 못한 무언가이기도 하다. 이른바 "변수"인데,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에디가 없었다면 윌리는 진작에 뉴욕 생활에 질려 버렸을 것이다. 설사 그게 도박이라도 말이다. 결국, 에디는 윌리를 붙잡았던 한 요인이다. 윌리는 그런 에디에게 에바를 데리고 플로리다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에바는 플로리다에서 "기회"를 잡아 고향으로 떠나고, 에디는 에바를 붙잡기 위해 떠난다. 기회가 기회를 붙잡는 형국이다. 마치 우로보로스의 형상이다. 과거와 미래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세 인물은 마지막에 목적지가 갈린다. 윌리는 기다리고, 에디는 붙잡고, 에바는 떠난다. 에디는 아직 떠나지 않은 에바를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고, 에바는 현재에 미련을 느껴 하루를 늦춘다. 이게 내 눈에는 마치 "변함없는 일상에 찾아온 기회에 대한 세 가지 방향성"처럼 보인다. 우리는 현재가 권태롭고 미래가 나태하다면, 기회가 찾아왔을 때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나를 대신해 먼저 떠난 사람을 바라만 볼 것인가, 기회를 찾아 떠난 사람을 따라갈 것인가, 기회가 왔음에도 다시 현실로 회귀할 것인가.

 짱구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 포스터

짱구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 포스터 ⓒ 신에이 동화


[둘]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2001)

짐 자무시 감독의 1984년 작 작품 <천국보다 낯선>은 하라 케이이치 감독의 2001년 작품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아래 <어른 제국의 역습>)과 닮은 면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국보다 낯선>보다 후기에 나온 <어른 제국의 역습>이 짐 자무시의 작품을 변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시리즈의 9번째 작품인 <어른 제국의 역습>은 오묘하다. 그저 아동용으로 기획되던 짱구 극장판 시리즈는 어른 제국의 역습부터 내용이 오묘해졌다. 어린아이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고, 어른들이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함이 있다. 마치 아동용 애니의 속과 겉이 뒤집힌 듯한 느낌이다.

그 후에도 수많은 오묘한 극장판 시리즈가 많이 나왔지만, 그 무엇도 <어른 제국의 역습>을 따라잡지 못했다. 성인층에 어필한 타 짱구 극장판 작품이 주로 드라마나 가족애의 형식을 많이 차용했다면, 어른 제국의 역습은 어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말하자면 나를 구성하는 과거의 사회고, 작게 말하자면 향수다. 가족애나 역사적 배경 같은 것은 나중에도 보고 듣고 익힐 수 있지만, 향수는 그렇지 않다. 그 시대, 그 시절이 아니면 알 수 없다. 그저 막연한 무언가일 뿐이다.

작품의 배경이 일본이지만 우리가 봐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아마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가 무척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거품이 꺼지던 1990년대에 우리는 외환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다가올 새천년은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파는 현재까지 남았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사상은 퇴보했다. 자본은 윤택해졌지만, 삶이 각박해졌다. 언젠가 이 영화가 더는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어른들은 추억에 젖어 마을을 떠난다. 아이들이 미래라면 어른들은 과거이기에 과거가 사라진 현실로 볼 수 있다. 과거가 사라진 현실은 그저 혼란스럽다. 폭동이 일어나고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된다. 언론은 사라졌고, 의지할 것은 친구들뿐이다. 한데 모여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들은 어른들이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른들을 구하기 위해 떠난다. 더는 나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어른들을 위해 말이다.

누구나 찬란했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 위에 세워진 현재가 우리를 떠받들기 때문이다. 가졌던 것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우울하고 어두운 날이든, 밝고 맑은 날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한낱 트라우마조차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알던 과거가 모두 사라진다면 어떨까. 그저 행복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까. 뿌리가 없다면 가지가 설 수 없다. 바로 잡아야 할 실수를 모른다면 고칠 수 없다. 아이들은 그런 혼란을 겪고 있다.

이어지는 중반부에 아이들은 어른 제국의 위협을 피해 어른 제국 내부로 향한다. 영화로 표현하자면 심각한 상황이 애니메이션의 연출을 통해 가벼워진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상당히 무겁지만, 짱구 특유의 유머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한다. 과거에 사로잡힌 짱구의 부모가 짱구가 탄 버스를 추격하는 장면이라던가, 식량이 떨어진 아이들이 무력이 점거한 편의점에서 몰래 식량을 훔쳐오는 장면이 그렇다. 어려진 어른들과는 반대로 술을 마시며 상황극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짱구가 과거에 사로잡힌 아빠를 만나 현재로 다시 되돌려놓는 장면이 있다. 짱구는 악당이 했던 말을 떠올려 현재의 향을 아빠에게 불어넣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냄새를 일깨우는 건 현재의 냄새다. 아빠의 발 냄새는 그저 고약하고 떨떠름한 악취처럼 보이지만, 지나온 삶의 향수이다. 수많은 이들이 과거를 염원하는 장소에서, 조금만 숨을 쉬어도 과거로 돌아가는 그곳에서 지나온 삶의 향수가 과거를 압도한다. 결국, 현재는 과거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향한 염원이 어떠하든 간에 말이다. 되돌아갈 수 없다.

과거에서 풀려난 짱구의 가족들 앞에 악당 "켄"이 나타난다. 자신을 경계하는 짱구 가족에게 켄은 조용히 따라오라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의 풍경은 눈앞에 현존함에도 아련하고, 아스라이 흩어진다. 박제가 되어버린 과거에 취하지 않기 위해 냄새나는 신발을 코 앞에 들이대는 짱구 부부의 모습은 짠하다. 켄은 짱구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다시 보내준다. 미래를 손에 넣고 싶다면 행동하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짱구 가족은 과거의 냄새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밖으로 탈출한다. 과거로부터 도망쳐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해 달린다.

막연하게 짱구 가족 앞을 가로막던 다른 악당들과는 다르게 켄은 선택권을 준다.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과거를 선택할 것인지 말이다. 겉으로는 미래를 없애려는 자신들의 야망을 막아보라는 말이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절박하게 손을 내밀어야 미래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켄 또한 과거를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기에 두 의견은 강하게 충돌한다. 그러나 켄은 짱구 가족을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부하들을 동원해 계단을 올라오는 짱구 가족을 약하게 저지할 뿐이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을 과거의 향수가 가득한 20세기 마을에 중계하기까지 한다. 짱구 가족을 포함한 모두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켄은 계단 중간에서 마주친 짱구 아빠에게 묻는다. 돌아갈 생각은 없냐고 말이다. 당연히 짱구 아빠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답하고, 이에 켄은 시시한 인생이었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짱구 아빠는 내 인생은 시시하지 않다고 말한다. 가족이 주는 행복을 나눠주고 싶을 정도라고 덧붙인다.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이동하는 과거의 악당과 계단을 통해 힘겹게 뛰어가는 현재의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과거의 시간이 현재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지나 가버린 시간은 금세 기억 속에서 잊힌다. 다만 그 아래에 현재가 깔려있을 뿐이다.

가족은 현재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과거 사랑의 결실이 오늘의 자식과 부부를 형성한다. 오랜 세월 위에 쌓인 가족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과거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잘살아왔고, 나름 성공했다. 비슷한 삶은 있어도 같은 삶은 없다. 결국, 시시한 인생 따윈 없고, 모두가 새로운 현재를 살고 있다. 과거가 무서운 것은 결과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랬었다면 어땠을까 하며 상상을 해보지만, 헛된 상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현재는 발전하고, 미래는 그저 현재가 늘어진 것에 불과하기에 더욱 과거가 무섭다.

두 작품의 묘한 교집합

두 작품의 주제의식은 "미래와 과거에 대한 담론"이라는 점에서 같다. <천국보다 낯선>이 변하지 않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무기력의 표시라면, <어른 제국의 역습>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두어 현재를 변하지 않게, 혹은 과거로의 퇴행에 대한 반발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유기적이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나온 고민하는 사람들이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불확실한 미래에서 회귀해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나오는 두 악당은 <천국보다 낯선>에서 나오는 두 주인공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단지 성별이 역전되었을 뿐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던 "윌리"는 20세기의 냄새만을 그리워하는 악당 "켄"의 연인 "마사네"처럼 보이고, 미래와 과거 사이에서 고민하던 "에바"는 미래를 되찾으려는 짱구 가족에게 선택권을 주는 악당 "켄"처럼 보인다.

두 작품에서 나오는 대사 또한 비슷하다. <천국보다 낯선>의 에디는 뉴욕의 낡은 원룸, 클리블랜드의 눈 덮은 황야, 플로리다의 메마른 바다를 바라보며 말한다. "어딜 가도 왜 이렇게 다 똑같은 거지" 간절히 바라며 천국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이 지금까지의 삶과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고독해지고 발은 방황한다. <어른 제국의 역습>의 켄은 20세기의 향수가 담긴 마을에서 노을 진 석양길을 걸으며 말한다. "그때 사람들에겐 꿈과 희망이 있었어. 그들에게 21세기는 희망 그 자체였지. 하지만 모든 게 달라졌어. 남아있는 것은 썩어버린 돈과 타지 않는 쓰레기뿐… 우리가 꿈꾸던 21세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켄은 지금 사는 현재가 과거보다 못함을 되뇌며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두 인물은 모두 현재를 부정하고 있다. 차이점은 과거로 향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20세기 마을"의 주민들이 감시 카메라로 비치는 장면을 TV로 보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감시 카메라는 미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짱구 가족의 모습을 연이어 비추고, 그것은 흑백 TV에 고스란히 중계된다. 흑백 TV 속의 모습은 <천국보다 낯선>의 흑백 스크린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를 막는 과거를 향해 뛰어가는 짱구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회귀하려는 에바"를 막으려 비행기에 올라탄 에디를 떠올린다. 에디가 친구의 사촌에 불과한 에바를 위해 비행기에 올라탄 것처럼, 짱구 가족 또한 자신들의 인생과는 직접적인 관계조차 없는 악당들의 계획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줄곧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켄의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짱구 가족은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고, 온 몸을 던져 악당 부하들을 저지한다. 이에 짱구 홀로 남아 엘리베이터를 탄 켄보다 빠르게 탑의 상층부를 향해 뛰어 올라간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보이는 짱구의 달리기 신은 애니메이션적 연출이 돋보인다. 달려나가는 짱구의 모습이 30여 초 동안 롱테이크로 잡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인물의 선이 거칠어진다. 거칠거칠한 작화 터칭은 뒤로 갈수록 헐떡이고 넘어지는 짱구의 모습을 뒷받침하며 미래에 대한 열망을 부각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과거의 냄새를 전국에 뿌리는 기계가 있는 상층부 층에 도착한 켄이 계단 쪽을 살짝 쳐다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창 사이 계단에서 보이던 짱구 가족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며 기계를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그러나 살짝 늦게 도착한 짱구가 켄의 발목을 붙잡고, 켄은 짱구를 뿌리치고 걷는다. 짱구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계속해서 켄의 발목을 붙잡는다. 결국, 짱구는 쓰러지고, 켄은 기계를 작동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나 이미 과거의 냄새 농도는 바닥까지 내려간 후다.

과거 냄새 농도는 켄의 과거 마을 주민들이 과거를 부정했기 때문에 낮아졌다. 이는 켄이 중계한 짱구 가족의 활약상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다. 작전의 실패를 알리는 켄의 말을 들은 과거 마을 주민이 흘리는 눈물은 명백하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눈물이다.

과거를 그토록 갈망하던 켄의 연인인 마사네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있는 짱구에게 원망하듯 묻는다. 현실의 미래 따위는 추할 뿐인데 어째서 우리를 막아섰냐고. 그러자 짱구가 답한다. 다퉈도 화가 나도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켄은 20세기의 종언을 선언하며 짱구에게 미래를 되돌려주겠노라 답하고 옥상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이제 막 켄과 마사네가 탑 아래로 떨어져 자살하려고 하는 순간 밑에서 날아오른 비둘기에 놀라 둘은 뒤로 물러선다. 그 비둘기는 탑의 구멍 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날아오른 것이다. 결국, 켄은 남겨진 미래로서의 죽음도, 실패한 과거로서의 죽음조차도 포기하고 만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날아오른 비둘기는 켄의 죽음을 막아 과거의 상실을 저지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계단을 뛰어오른 짱구는 기계의 작동을 막아 미래의 상실을 저지한다. 결국, 켄과 짱구 가족은 현재를 살게 되었다. 질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시간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 항상 회귀하는 가능성이다. 찬란했던 과거가 그립고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도,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은 현재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에 대한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왜곡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짐자무시 천국보다낯선 어른제국의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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