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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NS를 훑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봤다. 작성자가 그랬듯 나 역시 교과서를 통해 이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 소설이 '일제강점기 조선 하층민의 궁핍한 삶과 가장 운이 좋은 날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다루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내가 본 글은 누구도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자신의 아내에게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김첨지가 부인에게 저지른 일은 아무리 봐도 학대나 다름없는데 이를 명확하게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주인공이기에 아내보다는 그에게 더 이입해야 한다고 쳐도 이상하다. 김첨지는 인생이 불행하다. 그래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게 당연한가?

사실 이건 <운수 좋은 날>만의 문제도 아니다. 각양각색의 이유와 방식으로 자기 주변 여자들의 인생을 망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문학과 영화, 드라마를 막론하고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운수 좋은 날>을 배웠던 방식과 비슷하게 해석되고 평가되었다. 마치 한국 사회에선 남자들이 자기 인생이 곤경에 빠질 때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구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하나의 작품을 이런 식으로 읽어내는 것에 윤리적인 잣대까지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백발 양보해 말하자면 그것은 평가자의 성실함과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발생해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경우는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유해하다.

'불행해서' 폭력 휘두르는 남성, 전혀 당연하지 않다

며칠 전 한 여성이 자신의 가게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자. 많은 언론사가 가해 남성이 무직이었으며 빚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이 중요한 이유인 양 다루었다. 심지어 한 방송사는 SNS 계정으로 '카드빚 600만 원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뉴스를 공유했다.
 며칠 전 한 여성이 자신의 가게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자. 많은 언론사가 가해 남성이 무직이었으며 빚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이 중요한 이유인 양 다루었다. 심지어 한 방송사는 SNS 계정으로 '카드빚 600만 원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뉴스를 공유했다.
ⓒ SNS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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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며칠 전 한 여성이 자신의 가게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자. 많은 언론사가 가해 남성이 무직이었으며 빚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이 중요한 이유인 양 다루었다. 심지어 한 방송사는 SNS 계정으로 '카드빚 600만 원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뉴스를 공유해 마치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이 경제난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소득은 없는데 빚만 있는 상황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처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여성이 백주대낮에 칼을 들고 남성이 혼자 있는 사업장에 잠입해 성폭행을 시도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 기억으론 전혀 없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건 생활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데 왜 누구는 자력구제를 택하고 누구는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냐는 것이다. 가해자가 무직에 빚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사건의 인과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가해 남성이 한 인터넷 방송을 통해 피해자가 홀로 일하는 여성이라는 점을 알아내고, 손님으로 위장해 예약까지 할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을 떠올려 보자.

가해자가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범행을 저지르리라 마음을 먹었을까? 애초에 그가 혼자 일하는 여성을 자신이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취약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벌였을까? 말하자면 이번 사건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의한 페미사이드(Femicide)의 전형이지 결코 경제난이 불러온 비극이 아니다.

범죄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 유해한 이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때에도 그 사건은 단지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범행을 저질렀을 뿐 딱히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식의 설명이 등장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때에도 그 사건은 단지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범행을 저질렀을 뿐 딱히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식의 설명이 등장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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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성이 여성을 살인하거나 폭력을 저지른 사건에 불필요한 설명이 덧대어 지고, 그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일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때에도 그 사건은 단지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범행을 저질렀을 뿐 딱히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식의 설명이 등장했다(그리고 이 같은 이야기는 정신 질환을 가진 이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최근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자 한 신문에는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이 '루저'가 된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칼럼을 실리기도 했다. 한창 사회가 여성 혐오 문제로 달아 올랐을 때에는 어땠는가. 계급적 불안이 원인이라는 분석에서부터 심지어 부동산 문제 때문이라는 말까지 아주 '난리가 났다'.

문제는 언뜻 객관적인 분석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남성들의 폭력에 알리바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젠더 폭력과 여성 혐오의 원인이 극단적인 계급 차이나 경기 침체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들이 그런 문제를 겪는 것이 어떻게 여성을 때리거나 죽이고 혐오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가?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누구나 겪는 불안을 유독 남자들만 그런 식으로 해소한다면 질문해야 하는 것은 남성성 자체가 아닌가?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남성 집단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설명은 이 모든 질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남성 집단의 문화와 스스로가 지닌 남성성을 성찰하고 변화시킬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남성들의 젠더 폭력과 여성 혐오를 변명하는 보도나 분석이 멈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질문해야 할 것은 '왜 그 남자는 그랬을까'가 아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이다.
 나는 더 이상 남성들의 젠더 폭력과 여성 혐오를 변명하는 보도나 분석이 멈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질문해야 할 것은 '왜 그 남자는 그랬을까'가 아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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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성성 자체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상황을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기도 한다. 당장 남성의 성범죄를 둘러싼 말들을 살펴보라. '술에 취한 나머지 자제력을 잃어서', '젊은 나이의 철없음과 치기로 인해'와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이 같은 언설은 남성 가해자를 비호하는 데 매우 빈번하게 사용된다.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정작 문제는 자신의 자제력과 치기와 철없음 때문임에도 말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범죄를 향한 분석들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단지 남성 개인이 아닌 남성 집단을 보호할 뿐이다. 시대나 지역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반복되지만 남자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바꿀 이유가 없다.

얼마 전 한 언론 보도를 통해 교실에서의 여성 혐오가 문제로 지적된 적이 있다. 같은 반 여학생에 대한 남학생들의 여성 혐오적 발언이나 성희롱이 심각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기사였다. 같은 학생뿐만 아니라 여성 교사를 대상으로도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설문에 따르면 남학생들의 66%가 여성 혐오 표현에 공감을 표했으며, 여성 혐오의 원인으로 50%가 여성가족부를, 40%가 '남자에 의존해 사치를 일삼는 여자'로 지목했다고 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남성의 삶에 관한 기초연구(Ⅱ)' 보고서).

집단적 남성성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는 행동이 이런 식으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각한 위험 신호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남성들의 젠더 폭력과 여성 혐오를 변명하는 보도나 분석이 멈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질문해야 할 것은 '왜 그 남자는 그랬을까'가 아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이다.


태그:#여성 혐오, #페미사이드, #혐오 범죄, #남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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