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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왕이 되는 날, 궁에 따라 들어갔다 7일 만에 도로 나온 단경왕후 신씨.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의 주인공이다. 16세기 조선 사람들한테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 7일간 그는 왕비는 아니었다. 왕비 책봉식을 거치지 않았기에 그 7일간 중종 임금의 사사로운 부인이었다. 그런 상태로 쫓겨나 평생을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연산군이 왕세자였던 1487년,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이듬해 신수근의 동생이자 신씨의 고모인 훗날의 폐비 신씨가 연산군과 결혼하면서 신씨는 연산군의 처조카가 되었다.

신씨가 아홉 살이던 1495년, 연산군이 주상이 되면서 신씨는 세자의 처조카에서 왕의 처조카로 지위가 바뀌었다. 그리고 4년 뒤, 신씨는 열세 살 나이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훗날의 중종)과 결혼했다. 진성대군은 신씨보다 1년 늦게 태어났다. 이 결혼으로 신씨와 연산군의 관계는 복잡해졌다. 신씨는 연산군한테 처조카인 동시에 제수였다.

신씨 집안과 왕실의 관계가 족보상으로 복잡해졌다는 것은 이 집안의 권세가 그만큼 강해졌음을 반영한다. 신씨 아버지 신수근은 이 정권의 주요 실력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런 후광에 힘입어 신씨는 조선왕조의 최고 특권층 여성으로 성장해갔다. 

그런데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모든 게 한순간에 끝나는 것 같았다.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군이 한성부 시내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고모부의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니, 스무 살 된 신씨의 운명은 그렇게 내리막길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연산군을 형으로 둔 남편 진성대군의 심정은 더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쿠데타군이 자신의 집까지 포위하자 진성대군은 공포에 질려 자결을 기도했다가 신씨의 만류로 마음을 돌렸다.

왕의 처조카에서 왕비로? 아니 궁에서 쫓겨나

그런데 순식간에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집을 포위했던 쿠데타군이 진성대군을 체포하는 게 아니라 정중히 모셔가는 것이었다. 진성대군을 주상으로 추대한 것이다. 잠깐 위기에 몰렸던 신씨가 왕비가 될 게 확실시되는 처지로 바뀐 것이다. 그런 상태로 신씨는 경복궁에 들어갔다.

180도로 바뀌었던 상황은 다시 180도로 바뀌었다. 차기 왕비 후보로 궁에 들어갔던 신씨가 갑자기 구정권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주목받은 것이다. 이전 정권 임금의 처조카, 이전 정권 왕비의 조카, 이전 정권 실력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쿠데타군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물론 진성대군은 신씨보다 훨씬 더 구정권과 연결된 사람이다. 하지만, 진성대군은 쿠데타군한테 필요했다. 새로운 왕조를 창업할 역량이 없었던 그들이 쿠데타를 정당화하자면 기존 왕족을 주상으로 받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신씨만 쿠데타 주역들의 힘에 떠밀려 7일 만에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임금이 된 남편이 "어떻게 조강지처를 버리느냐?"며 항거했지만 소용없었다. 신씨가 쫓겨난 자리는 쿠데타 주역들과 연계된 후궁들이 메웠고, 이 후궁 중 하나인 윤씨(훗날의 장경왕후)가 이듬해인 1507년에 왕비가 되었다.

쫓겨난 신씨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머리가 비상했다. 판단력이 좋았다. 신씨는 '1인 시위'에 들어갔다. 조선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자기가 입던 치마를 널어놓았다. 남편과 세상에 메시지를 전할 목적이었다. 그가 알리고자 한 메시지는 "Don't forget me!"다. 이를 계기로 그 바위는 치마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인왕산과 경복궁.

인왕산과 경복궁.ⓒ 김종성


신씨의 1인 시위는 남편과의 재결합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남편 중종의 마음을 짠하게 했을 수는 있지만, 쿠데타 주역들한테 둘러싸인 중종을 신씨 곁으로 되돌려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상의 동정심을 사는 데는 도움이 됐다. 중종 즉위 이후의 정치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중종을 향한 '1인 시위'

연산군을 몰아낸 쿠데타 주역들은 연산군 시대의 지배층이었다. 그중 일부가 중종반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냈을 뿐이다. 원래부터 개혁적이 아니었기에 이들도 얼마 안 가서 세상의 신망을 잃었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말이 나올 만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재야의 개혁파 선비들과 선비 출신 신진 관료들은 쿠데타 주역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사림파 즉 유림파로 불리는 이들은 쿠데타 주역들을 몰아내야만 유교적 합리주의 정치 즉 왕도(王道) 정치가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림파의 눈에 신씨는 쿠데타 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이었다. 또 1인 시위를 통해 그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림파는 신씨한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게 되면서 신씨는 연산군 정권의 상징적 인물에서 개혁세력의 상징적 인물로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2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비 자리가 공석이 되자 사림파는 신씨를 그 자리에 앉힐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쿠데타 주역들이 몰아낸 신씨를 왕비 자리에 앉힘으로써 쿠데타 세력을 약화할 목적이었다.

중종은 신씨한테 미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다 품고 있었다. 그래서 신씨와 자신이 살던 옛집에 신씨가 살게 하고, 궁 밖에 행차할 일이 생기면 일부러 그 집 근처에서 쉬고, 자기가 탄 말이 피곤해하면 신씨 집에 보내 여물을 먹도록 했다.

하지만 중종은 재결합만큼은 꺼렸다. 중종은 연산군 정권을 부정하는 전제 위에서 왕이 됐다. 그런 사람이, 연산군 일파로 몰려 궁에서 쫓겨난 신씨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었다.

만약 중종이 그렇게 하면 중종 본인뿐 아니라 왕실에까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그래서 중종은 신씨를 왕비 자리에 앉히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사람은 장경왕후의 7촌 조카인 문정왕후 윤씨다.

그 후로도 중종은 계속해서 신씨한테 마음을 두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이 점은 중종이 죽기 직전에 신씨를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나돈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중종 39년 11월 15일 자(양력 1544년 11월 29일 자) <중종실록>에서 소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날짜 일을 기록한 사관은 그것이 헛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중종이 신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어서야 얻게 된 왕비 칭호

1544년 사망 당시 중종은 57세였다. 신씨는 58세였다. 중종이 죽은 뒤에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왕이 됐다. 인종은 착한 사람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신씨의 비극 덕분에 왕비가 됐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신씨를 폐비에 준해서 대우했다. 왕비로 인정한 것은 아니고, 왕비였다가 쫓겨난 사람으로 대우한 것이다.

인종의 조치는 후세 사람들의 착각을 조장했다. 신씨가 실제로 폐비였던 것 같은 착각을 만든 것이다. 신씨가 왕비로 궁에 들어갔다가 7일 만에 쫓겨났다는 오해를 만든 것이다. 임금의 부인이라고 무조건 왕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비 책봉식 즉 취임식을 거쳐야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신씨는 책봉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왕비가 아니었지만, 인종이 폐비로 대우하다 보니 백성들은 신씨를 7일 동안 왕비였던 사람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신씨를 극진하게 대우한 인종은 단명했다. 왕이 된 이듬해에 죽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왕이 됐다. 명종은 인종의 이복동생이다. 명종도 신씨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명종이 왕으로 있는 동안에 신씨는 세상을 떠났다. 1557년, 향년 71세였다.

그로부터 182년 뒤였다. 1739년, 영조 임금 때였다. 이때 신씨는 왕후로 추증되었다. 살아서는 왕비가 아니었지만 죽어서 왕비가 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중종의 왕비로 인정됐다. 살아서 못 푼 한을 그렇게 푼 것이다.

신씨는 경기도 양주시의 온릉에 묻혀 있다. 남편 중종은 서울 강남에 묻혀 있다. 선정릉(선릉+정릉)의 정릉이 중종의 무덤이다. 조선 왕릉 중에서 왕 혼자 묻힌 무덤은 셋뿐이다. 그중 하나가 중종의 정릉이다.

쓸쓸히 묻혀 있는 정릉의 남편을 보면서 온릉의 신씨는 재결합을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재결합하지 못하고 있다. 남편의 왕비라는 인정은 받았지만, 여전히 재결합을 이루지 못한 채 남편과 떨어져 있다.

 선정릉의 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의 지하철 선정릉역 인근에 있다.

선정릉의 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의 지하철 선정릉역 인근에 있다.ⓒ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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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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