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의 한장면

<불한당>의 한장면ⓒ CJ 엔터테인먼트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삼국지연의 속 조조가 도피 중인 자신에게 대접하려 돼지를 잡던 여백사 일가를 오해해 죽인 뒤 한 말이다. '인의'를 따르며 한동안 고생길을 걸었던 유비와 달리, 조조는 바로 이 모토 덕분에 승승장구한 끝에 당대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됐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영화 <불한당> 속 재호(설경구 분)의 이 대사는 앞서 조조의 말과 절묘하게 맞닿는다. 군웅할거로 혼란스런 후한 말기의 중국, 그리고 마약 밀수를 중심으로 조폭과 경찰이 뒤엉킨 대한민국 뒷골목의 생리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영화 속 인간 군상은 살아남기 위해 누구와도 동료가 되고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 속아 넘어가는 편이기보다 속여 넘기는 편에 서기 위해 어떻게든 타인을 이용하려 한다. 누군가를 거둬들이거나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모든 선택의 기준은 그저 '필요' 뿐이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온통 '불한당 같은 놈들'로 가득하다.

*아래 내용에는 영화의 결말을 제외한 주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불한당>의 한장면

<불한당>의 한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내내 불확실하게 그리는 '동료'와 '적'의 구도는 현수(임시완 분)를 중심으로 두 갈래로 뻗어 나간다. 한쪽은 재호(설경구 분)를 중심으로 한 범죄조직, 그리고 다른 한쪽은 천 팀장(전혜진 분) 휘하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현수는 대규모 마약 밀수조직 오세안무역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범죄자로 위장된 채 교도소에 보내진다. 복역 중인 오세안무역의 중간보스 재호에게 접근해 그의 신뢰를 얻고, 출소 후 조직에 합류해 정보를 캐내는 게 그의 임무다.

교도소에서 현수는 암살 위기에 처한 재호를 구해내고, 재호는 모친상을 당한 현수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현수와 재호는 3년간의 복역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둘도 없는 의형제 사이가 된다. 이런 두 사람에게 되레 무서운 쪽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경찰 기록을 지워 진짜 범죄자로 남을 수도 있다"고 협박 어린 회유를 하는 천 팀장, 그리고 조직 실세인 재호를 아예 매장하려는 오세안무역 회장 병철(이경영 분)이다. 이때부터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두 '불한당'의 이야기가 된다.

 <불한당>의 한장면

<불한당>의 한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이후 영화의 전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출소 후 같은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현수와 재호의 서사는 과거 교도소 장면들과 교차되며 숨겨진 진실들을 하나하나 쏟아낸다. 재호에게 "사실 나 경찰이야"라고 말하는 현수의 고백은 그 정점이다. 이는 재호의 신뢰를 얻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초강수로도 비치고, 한편으론 경찰을 배신하고 재호를 따르겠다는 결심으로도 보인다. 이를 받아들이는 재호의 내면 또한 현수에 대한 신뢰와 계산 사이에서 묘연하기만 하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현수와 재호 사이에 얽힌 온갖 계략과 사건의 전말들을 잇따라 폭로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진심만큼은 끝끝내 괄호로 남는다. 족보도 없이 자수성가한 조폭 재호와 이제 막 '불한당'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경찰 현수가 진정 서로를 믿었는가 하는 문제는 관객의 몫이다. 다만 이들이 빠진 불신의 늪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고독으로서 둘 사이의 괴리를 허물고 동병상련을 이룰 따름이다. 영화 말미, 이미 수없이 버려졌던 재호와 앞으로 수없이 버려질 현수가 마지막으로 나누는 연민 어린 눈빛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이는 불신으로 누적된 영화의 피로감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긴 여운으로 남는다. 오는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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