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가 친구들에게 광부들을 돕자고 말하고 있다

마크가 친구들에게 광부들을 돕자고 말하고 있다 ⓒ 영화사 진진


2년 전 이맘때 제주도를 한 달간 여행했다. 북쪽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딱히 어디를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강정마을은 꼭 들르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별 도움은 안 될 테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어슬렁거린다면 조금이라도 힘이 될 것 같아서.

예전에 들렀을 때 갔던 조그마한 마을 책방에서 유자차를 한 잔 마시고, 역시 예전에 들렀을 때 짓고 있던 도서관을 구경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책방 문을 닫는 날일 게 뭐람. 실망하고 나와 거리를 걷는 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처럼 매끈한 나무에 마치 나뭇가지처럼 화살표 모양의 팻말이 세 개 솟아 나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렇게 쓰인 팻말이었다. '용산 478Km', '안산 단원고 455km', '쌍용자동차 420km'. 방향 감각 없는 내가 봐도 이 화살표는 육지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이곳 강정마을에 있지만 마음만은 당신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말. 팻말은 연대를 위한 손짓이었다. 영화 한 편이 커다란 연대의 제스처인 <런던 프라이드>를 보자 떠오른 기억이었다. 영화에서 다이(패디 콘시딘)는 마크(벤 슈네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복지 센터에 깃발이 하나 있어. 그 깃발에는 손을 맞잡은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지. 두 개의 손이 의미하는 건 네가 날 지지하면, 나도 널 지지한다는 거야. 네가 누구이든, 어디에서 왔든, 손을 맞잡을 거라는 의미이지."

 연대란 손을 맞잡는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연대란 손을 맞잡는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 영화사 진진


연대란 손을 맞잡는 것

영화는 서로 교집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광부와 게이, 레즈비언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84년 영국의 광산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당시 이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게이, 레즈비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던 이들은 '우리 광부를 위한 모금을 하자!'라고 말하는 마크의 말에 팔을 걷어붙인다. 단지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이유 없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이들은 정부와 대치중인 광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약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광부들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저 타인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며 아무런 조건 없이 시작된 모금. 하지만 LGSM(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모임은 정작 그들이 도움을 주려는 광산 노조로부터 거절의 메시지를 받는다. 게이와 레즈비언에게는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것. 하지만 어차피 시작이 '조건 없음'이었기에 LGSM은 직접 웨일즈의 한 마을에 연락을 취하게 되고, 그렇게 서로 이질적인 두 집단은 서먹한 첫 만남을 갖는다. LGSM을 이끌고 있는 마크는 다이에게 광부를 돕겠다고 나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게이들의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노동자의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여성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요? 이건, 비논리적인 거죠."

마크의 말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한 줌 권력자를 제외하고 우리 대부분은 어느 면에서는 늘 약자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지금과 같은 선거 때에는 우리의 권리를 대변해줄 정치인에게 지지 의사를 표한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타인의 권리에는 심각할 정도로 무감하다. 누군가는 타인의 권리를 반대하기까지 한다. 마크의 말대로 비논리적이다.

처음에는 광부들도 그랬다. 처음 보는 게이, 레즈비언을 어색해하며 LGSM 멤버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순수한 마음과 개개인의 매력이 빛을 발하며 서서히 마음을 연다. 이제 그들은 성소수자의 권리에도 관심을 갖고 연대하려 한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성소수자들을 위해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여한 광부들의 모습이었다. 한쪽에서 손을 내밀자 다른 쪽에서 손을 더 꽉 잡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을 한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을 한다! ⓒ 영화사 진진


영화는 꽤 진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게이, 레즈비언의 태도도 자신의 정체성에 긍지(Pride)를 갖는 모습이다. 이제 막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참석하기 시작한 20살 조(조지 맥케이)도 서서히 멤버들에게 동화되며 건강한 웃음을 되찾는다. 도망가지 않고, 피하지 않고, 숨지 않고 당당히 나서서 자기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멋지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근거 없는 조롱을 하고, 심지어 벽돌을 투척하지만 LGSM 멤버들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울기보다 웃는다. 무엇보다 그들이 게을리하지 않는 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깃발을 높이 든 성소수자들의 긍지에 찬 얼굴을 비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런던 프라이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