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필립스 영화에 등장하는 배 앨라배마호엔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 머스크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등장한다.

▲ 캡틴 필립스영화에 등장하는 배 앨라배마호엔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 머스크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등장한다.ⓒ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얼마 전 <캡틴 필립스>라는 영화를 봤다. 2009년 4월 있었던 실화로 미국 국적 컨테이너선 앨라배마호가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들에게 납치, 필립스 선장이 인질로 붙잡힌 사건을 그렸다. 2시간을 훌쩍 넘는 영화는 미 해군 특수부대가 소말리아 인질범들을 제압하고 필립스 선장을 구출하며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영화 초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등장하는 1만7000톤급 컨테이너선 앨라배마호 외벽엔 머스크 라인(Maersk Line)이라 적힌 문자가 도드라져 있다. 이는 앨라배마호가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덴마크의 머스크 소속 상선이라는 걸 나타낸다. 이 문구는 영화 전반에 걸쳐 수차례 보여지는데 머스크가 실제 선사기업이란 점을 떠올리면 상당히 이색적이다.

사실 난 머스크가 실제 선사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에서 그려진 머스크의 이미지가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필립스 선장과 일부 선원들의 용감한 모습이 보여지긴 하지만 위기를 자초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앨라배마호가 납치되기 직전 과정을 보자. 우선 필립스 선장은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도 이를 무시하고 해당 수역에 진입한다. 소말리아 해적은 레이더를 통해 앨라배마호가 다른 상선들과 동떨어져 소말리아 연안에서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역시 앨라배마호가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상선보다 빠른 침로를 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면은 앨라배마호가 무리하게 위험수역을 항해하다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머스크와 PG&E, 리먼 브라더스와 CBS

에린 브로코비치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 식당 종업원으로 까메오 출연한 에린 브로코비치. 그녀 가슴에 주연배우 줄리아 로버츠를 뜻하는 '줄리아'란 명찰이 달려 있다.

▲ 에린 브로코비치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 식당 종업원으로 까메오 출연한 에린 브로코비치. 그녀 가슴에 주연배우 줄리아 로버츠를 뜻하는 '줄리아'란 명찰이 달려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그간 수천편의 영화를 보며 나는 실제 기업이 영화에 부정적으로 등장한 경우를 얼마 보지 못했다. 특히 한국에선 더욱 그랬다. <캡틴 필립스>와 같이 할리우드에선 기업명이 그대로 쓰인 영화가 몇 편쯤 떠올랐으나 한국에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 한 편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어째서일까?

사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그 이름도 유명한 <에린 브로코비치>다. 중금속 성분이 든 유해약물을 그대로 방류해 인근지역 주민들을 병들게 한 대기업 PG&E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평범한 여성 에린 브로코비치의 법정분쟁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는 1992년 미국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에린이 서류정리를 하다 우연히 대기업 PG&E의 비리를 알게 되며 시작된다. 에린이 발견한 서류는 한 무더기의 의료기록으로 이를 살펴본 그녀는 PG&E 공장에서 유출된 크롬 성분이 수질을 오염시켜 힝클리 마을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변호사 에드와 함께 치밀한 조사를 벌이고 마을 주민 600여명의 서명을 받아낸 끝에 PG&E를 상대로 한 대규모 소송전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4년 뒤 법원은 PG&E에게 힝클리 주민들에게 3억33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라는 판결을 한다. 이는 당시 미국 법정사상 최대 규모 보상액이었다.

PG&E는 캘리포니아 일대를 중심으로 천연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대형 에너지업체다.

지난해만 해도 실제 기업이 등장한 영화가 여럿 개봉했다. 지난해 초 개봉한 <빅쇼트>는 각종 금융기관과 은행, 신용평가기관, 나아가 금융계에 영향력 있는 주요인사의 이름을 그대로 써 화제를 모았다. 20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면에 있는 부도덕한 금융계의 민낯을 까발린 이 영화에선 리먼 브라더스와 도이치뱅크, 무디스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언론이 처한 딜레마를 다룬 <스포트라이트>와 <트루스>에도 보스톤글로브나 CBS와 같은 언론사가 그대로 쓰여 현실감을 더한다.

왜 한국영화엔 기업이름이 안 나올까?

또 하나의 약속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노동자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 영화 제목으로 삼성그룹 광고카피인 '또 하나의 가족'이 고려됐으나 자체 논의 끝에 '또 하나의 약속'으로 변경됐다.

▲ 또 하나의 약속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노동자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 영화 제목으로 삼성그룹 광고카피인 '또 하나의 가족'이 고려됐으나 자체 논의 끝에 '또 하나의 약속'으로 변경됐다.ⓒ OAL(올)


반면 한국영화는 어떤가. 대통령까지 역임한 유명 정치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영화 <변호인>은 '실제 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내용은 허구'라는 웃지 못할 자막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극적 재미를 위해 상당한 각색을 해놓고도 'True Story'라는 자막을 자주 활용하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MBC PD수첩의 줄기세포 조작사건 보도를 다룬 <제보자>에서도 이 같은 모습이 엿보인다. 방송국과 신문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스포트라이트> <트루스>와 달리 <제보자>는 MBC를 NBS로 한학수 PD와 황우석 박사를 윤민철 PD와 이장환 박사로 바꾸어 등장시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건 <변호인>과 마찬가지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다룬 <카트>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이랜드 그룹이 2년 이상 근무한 상시고용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홈에버의 비정규직 계산원 등 계열사 노동자 700여 명을 해고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고 이 사건은 이후 한국 노동문제를 대표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배경이 된 사건이 너무나 명확함에도 <카트> 속 대형마트 이름은 '더 마트'라는 익명성 높은 이름으로 가려지고 만다. 이 영화가 실화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2007년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일부 관객 뿐이다.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노동자 사례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영화엔 피해자가 일했던 기업인 삼성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제목 역시 삼성그룹 광고카피인 <또 하나의 가족>에서 <또 하나의 약속>으로 한 발짝 비켜나 개봉했다.

네이버에서 이 영화 소개글을 보면 미국 IBM의 백혈병 노동자 사례가 언급되지만 '삼성'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명백한 실화영화가 이 지경이니 실화를 모티브 삼은 픽션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SK그룹 창업주 최종현 전 회장의 조카로 물류업체 M&M을 경영한 최철원 전 대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 <베테랑>과 연관돼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10년 10월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해주지 않는다며 SK 본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탱크로리 기사 유모씨를 회사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폭행했다. 그는 폭행 후 유씨에게 맷값으로 10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줬다.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는 계약해지를 당한 뒤 1인시위를 벌이던 화물연대 소속 기사를 집무실로 불러 하청업체 소장과 싸우게 한다. 이후 그는 기사에게 체불임금 420만원을 던져주는데 이 사건은 여러모로 최철원씨의 폭행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봐도 실제이야기, 영화에선 '실화와 무관'

카트 이랜드 홈에버 부당해고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 한 장면. 영화에선 이랜드 홈에버 대신 '더 마트'로 표현됐다.

▲ 카트이랜드 홈에버 부당해고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 한 장면. 영화에선 이랜드 홈에버 대신 '더 마트'로 표현됐다.ⓒ 리틀빅픽처스


지난해 말 개봉한 <판도라> 역시 '실화와 무관한 내용'이라며 선긋기를 시도한다. 영화는 당초 실제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려 했으나 수차례 회의 끝에 배경을 이름 모를 한 마을로 바꾸었다. 하지만 영화가 겨냥한 현실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영화 속 원전을 운영하는 기관은 대한수력원자력이고 사고가 발생한 노후원전의 이름은 한별 1호기다. 여러모로 한국수력원자력과 한빛 1호기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이처럼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에 비해 실제 기업이나 인물, 지명을 영화에 반영하길 꺼린다. 누가 봐도 실제 이야기라 여길 만한 내용을 다룰 때조차도 그렇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도 궁금해 전문가에게 이유를 물었다.

영화등급보류제 위헌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20여 년 동안 한국영화 진흥에 기여해 온 법률전문가 조광희 변호사(49·법무법인 원)는 "(할리우드와 한국 사이에) 법적으로 특별한 차이는 없지만 (영화제작자들이) 관성처럼 그렇게 하는 것 같다"며 "실제 이름을 써도 괜찮은 사안들이 있는데 다만 위험을 피하자는 차원에서 실명사용을 피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한국과 미국이 상표법이나 명예훼손 법리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명예훼손 면에선 공공의 이익이 크면 문제가 되지 않고 상표법상에서도 브랜드를 도용하려고 쓰는 게 아니니 문제될 것이 없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을 피하려는 차원에서 그렇게 해온 것이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는 이어 "명예훼손 같은 일이 미묘해서 미리 사전에 (문제될 게 없다고) 자신하기 어려울 땐 이름을 바꿔서라도 비켜가기 쉽다"면서 "'또 하나의 가족'을 제목으로 쓸 경우 (노동자가) 백혈병에 걸린 게 사실일지라도 삼성의 책임이냐 하는 건 그와 다른 문제니 논란이 될 여지가 있는데 명칭을 안 쓰게 되면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결국 할리우드가 실화영화를 적극적으로 제작하고 실화임을 강조하는 것과 한국 영화사들이 실화영화를 마치 실화가 아닌 것처럼 꾸미는 것엔 법적인 차이보다도 문화적인 차이가 크다는 결론이다. 할리우드 대규모 영화사에 비해 영세한 규모의 한국 영화사가 대기업과의 소송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 역시 이 같은 현상의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어플 '소모임'서 영화&책 모임 '블랙리스트' 운영, 팟캐스트 '블랙리스트: 선택받지 못한 놈들' 진행, 빅이슈 '영화만물상' 연재 / http://goldstarsk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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