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긴 홍명보  홍명보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사퇴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 2014년 7월 10일 홍명보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사퇴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이희훈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축구대표팀 사령탑 부임 초기만 해도 신드롬을 일으켰다. 호주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동아시아대회와 월드컵 2차예선에서 장기간 무패 가도를 달릴 때만 해도 슈틸리케 감독의 리더십에 쏟아지는 찬사는 대단했다.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고평가는 전임자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됐다. 홍명보 전 감독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과에 그쳤다. 하지만 많은 팬들을 진정으로 실망한 것은 단지 결과적인 성적표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칙 없는 선수 선발과 잦은 말 바꾸기, 특혜와 파벌 의혹으로 얼룩진 대표팀 운영으로 국가대표의 명예와 기강을 바닥으로 추락시킨 데 대한 분노였다.

슈틸리케호가 출범하면서 내건 슬로건이 바로 '타임 포 체인지'(Time for change, 변화할 때)였다. 초창기의 슈틸리케 감독은 모든 면에서 홍명보 감독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름값에 연연하여 인위적으로 선수들의 '급'을 나누지도 않았고 전국을 돌며 무명이라도 재능있는 선수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호주 아시안컵에서 '군데렐라' 신드롬을 일으켰던 무명 이정협의 활약은, 소속팀에서 출전도 제대로 못하던 박주영에 대한 집착과 무리수로 월드컵을 망친 홍명보 감독과 대비되어 화제를 모았다. 대표팀에서는 항상 '제3의 골키퍼'에 머물던 김진현의 주전 기용,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했던 베테랑 차두리의 맹활약 등도 모두 이전 홍명보 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슈틸리케 감독은 합리적인 판단과 기준을 바탕으로 '실리축구'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한국축구를 재건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덧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묘하게도 현재의 슈틸리케 감독은 점점 전임자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답습해가는 모습으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감독' 홍명보는 왜 실패했을까

홍명보 감독이 나름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서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박주영' '유럽파' '런던올림픽 세대' '4-2-3-1 포메이션'같은 키워드로 요약되는 홍명보의 축구는, 한 마디로 기존의 성공방식 혹은 한 가지 패턴에 대한 의존에서 한치도 더 전진하지 못하는 원 라이너(One-liner)형 리더십의 전형적인 한계였다. 하필 당시 홍명보 감독이 취임 당시 내건 슬로건이 '원팀·원골· 원스피릿'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홍명보 감독은 열린 정답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공식을 고민하고 탐구하기보다는, 이미 스스로 정해놓은 모범답안에 공식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답정너' 스타일의 무능한 지도자였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중용하겠다'는 원칙을 하루아침에 뒤집거나, K리거(B급 발언)와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여과없이 드러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도 홍명보 감독의 철학 부재와 편협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최종예선 이후 보여주고 있는 행보도 이와 유사하다. 대표팀에 언제부터인가 경쟁과 원칙이라는 단어는 자취를 감췄다. A매치 때마다 거의 쓰는 선수들만 돌려막고, 소속팀에서의 경기력과는 무관한 선수선발이 점점 잦아졌다. 단조로운 용병술과 경기운영 패턴이 상대팀에게 번번이 읽히고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흡사하다.

 지난 13일 오전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한국 축구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명단발표 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 13일 오전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한국 축구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명단발표 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눌한 언행과 궤변으로 듣지 않아도 될 비난을 자초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심지어 지난 이란전 패배 직후 터진 "한국에 소리아 같은 선수가 없었다"는 핑계성 발언은 홍명보의 사퇴 기자회견 당시 "K리거는 B급이었다"는 발언과 맞먹는 희대의 망언으로 축구팬들의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현재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축구팬들의 신뢰는 많이 깎인 상태다.

냉정히 말해 2014년의 홍명보호나 2017년의 슈틸리케호나 선수구성이나 색깔, 팀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 면에서 더 이상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경기력에 의문부호가 붙는 일부 해외파(유럽-중국파)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여전하다. K리거와 베테랑에 대한 홀대도 비슷하다.

차두리의 은퇴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중용되는 30대 이상 선수는 곽태휘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작 곽태휘는 뚜렷한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기량이 하락세다. 슈틸리케 감독은 부상으로 애초에 중국전 출장이 불가능했던 곽태휘를 '리더십'을 명분으로 무리하게 발탁했으나 불과 4일 만에 김보경으로 교체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정작 염기훈, 이근호, 정조국, 이명주 등 K리그나 소속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던 다수의 선수들은 여전히 슈틸리케 감독의 외면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세대교체가 활발한 것도 아니다.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 벌써 2년 반이 흘렀지만 주전급 선수 중에서는 손흥민이 아직도 대표팀 막내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황희찬, 권창훈, 허용준, 김동준 등 젊은 선수들도 간간히 이름을 올리고는 있지만 A팀에서 아직까지 확실하게 자리잡으며 꾸준히 기용되고 있는 선수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여전히 이정협 고수하는 슈틸리케

슈틸리케 감독의 황태자로 꼽히던 이정협은 호주 아시안컵 이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올시즌에는 소속팀 부산이 K리그 챌린지에 머물리며 다시 2부 리거 신세가 됐으며 최근 소속팀이나 대표팀에서의 활약상도 저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정협이 슈틸리케 감독의 '플랜 A'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홍명보 감독이 박주영에, 최강희 감독이 이동국에 집착했던 것처럼, 또다른 철밥통 축구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대표팀 감독들의 공통적인 '플랜 B'였던 장신 공격수 김신욱이 슈틸리케 호에서도 최종예선에 접어들며 주전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묘한 데자뷰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최종예선에서의 부진으로 한때 경질설까지 거론되었다가 우즈벡전 승리로 조 2위를 탈환하며 일단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험난한 후반기 일정을 감안할 때 슈틸리케 감독의 입지는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다가오는 중국-시리아와의 2연전이 더욱 중요해졌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여전히 기존의 선수선발과 팀 운영을 답습하는 듯한 모습으로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조마조마하지만 싫든 좋든 이제 한국축구는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의 운명을 슈틸리케 감독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라도 슈틸리케 감독은 전임자가 남긴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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