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멈췄고, 그렇게 연결됐다.

그들은 멈췄고, 그렇게 연결됐다. ⓒ 영화사 몸


각자의 삶을 걸어온 젊은 남녀가 그 걸음을 멈춰 서면서 서로 연결된다. 경찰 수완(김재욱 분)과 행사 도우미로 일하는 정원(서예지 분) 얘기다. 다르지만 닮은 상처를 지닌 이들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함께 죽기로 뜻을 모은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이런저런 상의를 거쳐 '고통은 없지만 확실하게' 죽을 방법을 찾고 약속 시각과 장소도 정한다. 남은 몇 날 동안 무표정하게 삶을 정리한 끝에, 이들은 마침내 한겨울의 춘천으로 향한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개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비추는 작품이다.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들의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고, 죽음을 결심한 이들의 태도를 평화로울 정도로 담담하게 그린다. 말하자면 동반 자살을 기도하는 수완과 정원에게서 보이는 건 "죽고 싶다"는 충동이 아니라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자조다. 언젠가 한 번 길을 잘못 든 바람에 이젠 도대체가 헤어날 길을 찾을 수 없는 무력감 말이다.

 우리는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 영화사 몸


극 중 두 주인공이 지켜야 할 대상이면서도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부모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불치병으로 몸져누운 엄마의 수발을 드는 정원, 어린 시절 자신의 실수로 엄마를 잃은 수완의 에피소드들은 나란히 이들의 상처를 설득력 있게 조명한다. 두 사람이 각자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치부와 마주하고, 이를 통해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지점은 특히 뼈아프다. 플래시백(회상 장면) 없이 당사자의 고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전사(前事)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이들의 복합적 트라우마를 효과적으로 상기시킨다.

수완과 정원이 D-DAY를 앞두고 따로 또 같이 3일간 춘천을 여행하는 영화 후반부는 한겨울 춘천의 경관과 함께 뇌리 깊숙이 각인된다. 특히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수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그의 처지를 절묘하게 은유한다. 드넓은 얼음판 위에 자그마한 점으로만 보이는 그는 빙어 축제를 즐기는 관광객들과 대비되며 더욱 고독해 보인다. 여기에 수완과 정원이 청평사, 카페 뜨락 등 춘천 곳곳의 명소를 오가는 장면들은 넌지시 두 사람의 동행을 로맨틱하게 비춘다.

 <다른 길이 있다>가 제시하는 또 다른 '길'.

<다른 길이 있다>가 제시하는 또 다른 '길'. ⓒ 영화사 몸


<다른 길이 있다>라는 제목대로, 결국 영화는 두 주인공에게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더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거라거나 반대로 마음을 다잡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갈 거라고 단언하는 건 아니다. 수완과 정원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연인이 되지도 않고, 가족 앞에 돌아가 모든 걸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상처를 치유하지도 않는다. 다만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어떤 길에 뭐가 있든 간에 걸어볼 만하다고 말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두고 잠시 쉬어갈 순 있겠지만, 아예 걷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말이다. 오는 19일 개봉.

다른길이있다 김재욱 서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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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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