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교사>의 한 장면. 김하늘이 선생님으로 돌아왔다.

영화 <여교사>의 한 장면. 김하늘이 선생님으로 돌아왔다. ⓒ 필라멘트 픽쳐스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MBC 드라마 <로망스>(2002)에서 배우 김하늘의 입을 빌어 나온 이 대사는 곱씹어 봐도 미묘한 구석이 있다.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어쩌면 자신도 좋아하는) 남학생의 진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계급 구도를 들이대는 일종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를 지우고 '너'와 '나'도 지운 채 그저 학생과 선생이라는 객관적 지위만을 남긴다. 많은 교사가 학생 앞에서 굳이 자신을 '선생님'으로 객체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적 감정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스물네 살이었던 김하늘이 서른여덟이 되어 이 화두 앞에 다시 섰다. 바로 영화 <여교사>를 통해서다. 영화는 사립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인 효주(김하늘 분)가 새로 부임해 온 혜영(유인영 분) 때문에 정교사 자리를 놓칠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학교 재단 이사장 딸인 '금수저' 혜영을 시기하던 효주는 그가 자기 반 학생 재하(이원근 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약점 삼아 혜영을 압박한다. 그러던 중 효주가 무용특기생 재하와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새 국면을 맞는다.

 <여교사> 속 재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여교사> 속 재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 필라멘트 픽쳐스


<여교사> 속 재하의 의미는 14년 전 <로망스>에서 김하늘을 울린 관우(김재원 분)보다 훨씬 복잡 미묘하다. 영화 초반부 재하는 효주에게 있어 관심 밖의 문제아였다가 혜영을 '물 먹일' 도구가 되고, 그다음에는 자신의 꿈과 사랑을 담아낼 그릇이 된다. 혜영을 향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효주가 재하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드는 태도는 '치정'의 탈을 쓴 채 여러 갈래로 드러난다. 무용 콩쿠르에 나가는 재하를 위해 사비까지 써가며 학원을 등록하고 매번 차로 그를 '모시는' 효주는 이상적인 교사이자 헌신적 반려자로까지 읽힌다. 자신에게도, 10년을 사귄 남자친구에게서도 통 볼 수 없던 '밝은 미래'를 재하에게서 발견한 효주. 그에게 있어 둘 사이의 관계는 한때의 불장난 그 이상이다.

재하와 일탈적 관계를 이어가는 효주의 내면에 사회 시스템 속 약자의 무력감이 깔린 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효주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그를 둘러싼 학교 권력을 통해 보이는 장면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효주에게 "계약직이니까"라며 부당한 처우를 일삼는 학교, 그리고 "정교사도 아닌 주제에"라고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학생까지. 관객마저 분노케 하는 영화 속 폭력은 혜영에 대한 효주의 비뚤어진 심리를 차가울지언정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모든 걸 가진 혜영에게서 유일하게나마 재하를 '빼앗는' 효주의 모습은 일정 부분 연민을 자아내기에 이른다.

 <여교사>의 이야기는 '계급'의 문제를 드러낸다.

<여교사>의 이야기는 '계급'의 문제를 드러낸다. ⓒ 필라멘트 픽쳐스


결국 <여교사>는 계급 관계를 무너뜨리면서 역설적으로 계급 사회의 굳건함을 조명한다.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삼각관계는 성인과 청소년, 교사와 학생,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수저와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얽혀 위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 재하를 꿈꾸고 욕망하던 효주가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는 마지막 선택은 이러한 위계 속 인간성의 실종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효주에게 주어질 사회적 금기나 도덕성 따위의 잣대를 차라리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적어도 하나쯤은 원하는 걸 갖고 싶다는 바람. 이건 이 시대 모든 약자의 바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는 1월 4일 개봉.

여교사 김하늘 유인영 로망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것에 의미를 담습니다. 그 의미가 당신에게 가 닿기를.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