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영화화한 <판도라>가 오는 12월 7일 개봉을 확정했다. 해당 시나리오가 처음 돌기 시작한 지 약 4년 만이고, 영화를 다 찍은 이후 약 1년 6개월 만이다.
왜 이렇게 개봉이 어려웠을까. 장르나 제반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제작비 100억 원 중반 정도의 한국 상업 영화는 통상 4, 5개월에서 길게는 반년 이상의 실 촬영 기간을 거친다. 그리고 3, 4개월 정도의 후반 작업을 진행한다. 배급 시기만 잘 잡으면 촬영을 마친 그해에 개봉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실 <판도라> 관련한 여러 소문은 많았다. 국내 영화를 지원하는 정부 출자금 성격의 모태펀드가 돌연 투자를 철회해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복수 영화인들의 말이 돌았다. 그 외에도 관계 당국에서 알게 모르게 압력이 넣었다는 말도 들렸다. 물론 지난 9일 제작보고회 자리에 참석한 박정우 감독은 "후반 작업 일정이 길어져서 그랬다"며 이런 외압 의혹을 부정했지만, 이 영화가 거쳐 온 인고의 시간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시민들이 힘 보탠 작품이런 사례를 모아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흔히 말하는 '사회비판영화'라는 점. 최근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해서도 언급된 영화 <변호인>은 현 정권이 달가워하지 않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뤘다. 이에 투자배급사 NEW와 일부투자 CJ E&M이 압력을 받았고, 이미경 CJ 그룹 부회장이 퇴진하게 됐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용산참사를 상업 영화화 한 <소수의견>은 영화를 다 완성해 놓고도 약 2년간 개봉하지 못하다가 결국 원래 배급사였던 CJ E&M이 빠지고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을 맡으며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재심>(사법 권력과 검경의 안일한 수사 과정이 드러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다룸), <일급기밀>(국내 방위산업체 비리를 소재로 함) 등이 모태펀드 투자를 받지 못했다.
▲ '소수의견' 2년만에 개봉! 영화 <소수의견>은 애초 CJ E&M 투자배급이었으나, 촬영 완료 이후 2년 간 개봉하지 못한다. 이후 배급사가 시네마서비스로 바뀌면서 지난 2015년 6월에야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 이정민
영화 제작의 핵심인 투자 난항을 이기기 위해 국내 제작사들은 저마다 자구책을 마련해왔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방안이 일반 시민들의 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 펀딩'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암살단을 가상으로 그린 영화 <26년> 이후 이 크라우드 펀딩은 시민들의 참여도를 높이면서 영화에 대한 홍보 효과까지 누릴 수 있는 전략으로 사용되곤 했다. 앞서 언급한 <재심>은 포털사이트와 연계한 스토리 펀딩 방식을 사용했고, 삼성반도체 직원 백혈병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 등도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 상당 부분을 조달했다.
특히 <판도라>는 한발 나아가 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했다. 관객들의 지원을 받아 현물로 사례하는 게 아닌 일종에 수익에 따른 일정 금액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법 제도상 1년에 7억 원이 한도인데 <판도라>는 13일 만에 한도를 달성했다. 투자에 참여한 인원도 397명으로 상업영화 투자 크라우딩 펀딩 사상 최다인원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얘기다.
판타지와 묵시록 사이에서단순히 기대감만은 아닐 것이다. <판도라>가 묘사하는 설정 자체는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한 과제와 위기를 적확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묵시록적 성격이 있다. 알려진 대로 영화는 지진과 해일로 인한 원전 사고를 그린다. 공개된 예고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재난의 주원인이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아래 한수원) 관계자, 그리고 여기에 맹목적으로 찬성하며 자신의 이익을 바라보는 이들이라는 점.
상업영화의 특성상 영화는 이 재난을 맞은 주인공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걸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감동과 메시지가 전달될 공산이 크다. 더욱이 연출을 맡은 박정우 감독은 전작 <연가시>(2012)를 통해 기생충에 의한 재난 상황을 이미 묘사했다. 여기서도 잠시 정부의 무능과 안일함이 묘사되긴 했지만, 설정의 특성상 가족애가 더 극적으로 강조된 작품이다.
<판도라>가 현시점에 유효한 이유는 <연가시>와 달리 재난의 원인과 발생 양태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맞닿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 요직 캐릭터를 각각 김명민과 이경영 등이 맡았기에 정권의 문제점을 영화가 안일하게 비켜 묘사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 한수원을 상징하는 여러 캐릭터도 곳곳에 배치돼 있다. 국민의 안전은 외면한 채 이권을 위해 정권과 결탁하는 '핵피아'(원전 마피아)의 폐쇄성, 비밀주의 또한 비판할 것으로 보인다.
설계 수명 30년이 넘어 노후 원전으로 구분되는 월성1호기, 고리 1호기 등이 여전히 폐쇄되지 않은 한국이다. 게다가 이 두 원전이 경주와 부산시 등 도시 인근에 있어 유사시 대규모 참사를 피할 수 없다. 지진에 의한 재난이 <판도라>에 묘사되는데 우리 역시 지난 9월 경주 부근에서 진도 5.8의 강진을 경험하지 않았나. 한수원 측은 "국내 내진 설계 기준은 규모 6.5∼7.0"이라며 안전성에 문제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지만, 7.0 규모 이상의 지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원전이 세워진 지역이 활성단층임이 이번에 밝혀지며, 시민사회 각계의 우려가 극에 달해 있다.
또한, 여러모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비교될 가능성이 크다. 진도 9.0의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이후, 일본 사회는 현재까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진 관련 대응 매뉴얼이 한국보다 월등하다는 일본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판도라>는 단순히 영화적 판타지가 담긴 재난 영화이기보단 아직 오지 않은 참사를 시뮬레이션하는 일종의 묵시록적 성격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
오는 29일 <판도라>는 언론에 최초 공개되며, 관객 대상 시사회 이후 개봉한다. 이 영화가 현 정권의 '다이내믹'한 무능함에 또 다른 일침이 될 것인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이기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부터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래 덧붙인 영화의 예고편 감상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