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절벽으로 나 있는 길,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지상 500m 높이에 폭 1m가 조금 넘는 아슬아슬한 길. 평범한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안전장치라고는 빨간색 안전모와 지름 2cm의 밧줄이 전부다. 발아래 세상은 천 길 낭떠러지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 한 생애가 달려있다. 뙤약볕이 아니더라도 등판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는다. 고도의 긴장감에 녹아내린 근육들이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만 같다.

잔도공들, 아찔하게 내딛는 삶

잔도공들이  만든 잔도 중국 충칭의 지우충티엔에 만들어진 잔도

▲ 잔도공들이 만든 잔도 중국 충칭의 지우충티엔에 만들어진 잔도 ⓒ EBS


잔도란 절벽을 감싸 안으며 좁게 이어진 길을 가리킨다. 잔도를 만드는 사람들을 잔도공이라 한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절벽에 잔도가 놓이기 시작했다. 중국 충칭의 지우충티엔에는 해발 600-700m 높이의 산들이 많다. 앞으로 총 길이 5km의 잔도가 들어설 예정이다. 2016년 3월부터 지금까지 500m 구간을 완공해 놓은 상태다.

잔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잔도를 바치는 기본 뼈대를 설치해야 한다. 일일이 사람의 수작업으로 하는 일이라서 위험 부담도 크다. 절벽에 구멍을 내어 철근을 박고, 다시 철근에 쇠파이프를 끼워 넣는다. 철근의 기본 뼈대가 완성 되면, 그 위에 나무 뼈대가 설치된다. 폭 20cm의 좁은 나무판자로 잔도공들이 발을 딛고 설 공간이다. 작업은 항상 2인 1조로 진행된다.

요밍량(45)씨는 2000년부터 이 일을 시작해 경력 16년차인 전문작업공이다. 그에 비하면 샤더첸(54)씨는 경력이 짧아 전문일꾼을 돕는 보조작업을 담당한다. 잔도의 기본 뼈대를 만드는 전문일꾼의 허리에는 밧줄이라도 매어 있지만, 기초작업공에게는 달랑 빨간색 안전모가 전부다. 짐을 실어 나르는 보조일꾼에게는 허리에 동여맨 밧줄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잔도공에게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 모든 작업은 다 같이 시작해서 다 같이 끝낸다. 일을 균등하게 배분해야 잔도공들에게 다음 할 일이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서는 15명의 잔도공과 1명의 요리사가 함께 숙소에서 생활한다. 숙소는 작업장에서 1km 거리에 있다. 작업은 보통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5시 30분에 마친다. 

잔도공들은 목수처럼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짐을 나르는 단순한 일꾼들도 있다. 일이 힘든 만큼 보수도 괜찮은 편이다. 일을 하다 문득 발아래를 굽어보면, 고향생각이 날 때가 있다. 좁은 협곡 사이로 흐르는 개울가에서 아들과 함께 멱 감던 일이 떠오른다. 하지만 고향은 너무 멀다. 교통비가 비싸서 자주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잔도공들의 고향은 대부분 중국 동남부 장시성에 있는 위산이다. 이곳에서 1000km 떨어진 곳이다. 고향에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춘절 같은 큰 명절이 아니면, 고향문턱을 밟아볼 생각도 못 낸다. 일 년에 고작 두 달 정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오직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노역을 견딘다. 그들에겐 기필코 돌아가야 할 고향집과 기필코 다시 만날 가족이 있다.

잔도공의 가족, 그리고 고향집

2인 1조가 되어 잔도공들이 작업하는 현장 쇠파이프로 기본 뼈대를 만드는 요밍량씨와 옆에서 일을 거드는 샤더첸씨.

▲ 2인 1조가 되어 잔도공들이 작업하는 현장 쇠파이프로 기본 뼈대를 만드는 요밍량씨와 옆에서 일을 거드는 샤더첸씨. ⓒ EBS


요즘 같으면 샤더첸씨는 잔도공의 일이 참을 만 하다. 곁에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 시에위페이(52)씨는 이곳에서 잔도공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진다. 일을 마치면 남편 샤더첸씨가 부엌으로 들어와 아내를 돕는다. 샤더첸씨에게는 두 딸이 있다. 큰 딸은 결혼했고, 작은 딸은 아직 대학교를 다닌다. 집에 혼자 남은 작은 딸이 그리울 때면, 전화를 건다. 전화를 할 때마다, 딸은 이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자고 한다. 부모를 생각해주는 딸의 따뜻한 사랑이 1000km의 길을 가로질러 샤더첸씨의 마음속으로 날아든다.

샤더첸씨에게도 뜻밖의 일거리가 주어졌다.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폭이 듬성듬성한 철근 뼈대를 다시 손보는 일이다. 허리에 밧줄을 묶고 나뭇길 아래 놓인 쇠파이프에 발 디딜 곳을 마련해본다. 이쪽저쪽 움직여 보아도 불안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쇠파이프를 덧대는 일이지만,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처럼 긴장감이 몰려든다. 샤더첸씨의 하얀색 셔츠에 흙가루가 날린다. 조금 헤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 흙가루로 범벅이 된 샤더첸씨의 셔츠는 어느새 옅은 노란색으로 변했다.

잔도공에게 쉬는 날이란 비오는 날이다. 무급휴가인 셈이다. 그래서 흩날리는 빗방울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비에 젖은 쇠파이프와 나무판자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완전히 마를 때까지는 일을 나서지 못한다. 하늘이 허락해준 만큼 일을 하는 잔도공들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일을 할 수 있게 맑은 햇살을 보내달라고. 이글거리는 땡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며칠 째 비가 계속 퍼붓는다. 요밍량씨가 고향집을 가기 위해 짐을 꾸린다. 방학을 한 아들을 데리러 갈 참이다. 고속열차를 타고 10시간은 가야 고향에 도착할 수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그는 잔도공이었다. 모르지 않았지만, 막상 결혼생활을 꾸려가기에는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 많았다. 아내 묘융펑(42)씨는 아이가 아플 때가 가장 힘들었다. 밤새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혼자 운적도 많았다. 집안에 하얗게 칠한 페인트도 벗겨지고, 집 밖의 나무 잔뿌리가 집안 벽면을 타고 뻗어나간다. 남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집안 곳곳엔 보기 흉한 흠집이 나 있다.

삶과 죽음, 찰랑거리는 동전처럼

절벽에 매달려 쇠파이프를 설치하는 샤더첸씨 샤더첸씨의 하얀색 티셔츠가 흙가루로 범벅이 되어 옅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 절벽에 매달려 쇠파이프를 설치하는 샤더첸씨 샤더첸씨의 하얀색 티셔츠가 흙가루로 범벅이 되어 옅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 EBS


하지만 잔도공들이 있는 한 절벽은 막다른 끝이 아니다. 절벽에도 길이 생겨난다. 그 길을 만들기 위해 밧줄 몇 가닥에 온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오르내리며, 내딛는 한 걸음에 집중한다. 잡념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럴듯한 이유 역시 없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이 일 뿐이다.

아내 시에위페이씨가 애잔한 눈빛으로 남편 샤더첸씨를 바라본다. 큰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산을 내려가려는 중이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려니 마음이 착잡하다. 가파른 절벽을 오가는 일에 꽤 익숙해졌다지만, 위험은 언제 덮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의 곁에서 작은 것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이다. 희끗한 남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눈물인양 새하얗다. 승용차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울퉁불퉁한 산자락을 휘감으며 내달리는 자동차 바퀴 아래로 질척한 흙길이 미끄러진다.

수직으로 꺾인 절벽 앞에 서고서야 알았다. 길은 매달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매달리지 않는다면, 작은 한 걸음도 허락되지 않는다. 잔도공들은 오늘도 밧줄 몇 가닥에 매달린 채로 새로운 길을 연다. 자신들은 비록 매달렸지만, 누군가는 온전히 걸어 다닐 길을 내기 위해. '절벽'에서 시인 이상은 이렇게 썼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중략) 아아,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 - 이상, <절벽>

어쩌면 잔도공들은 보이지 않는 꽃의 향기와 보이지 않는 묘혈 사이를 매일 오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길을 내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은 주머니 속에서 찰랑거리는 동전의 앞뒷면이나 다름없다.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완성될 길을 여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인간은 절벽을 걷게 되었다. 그들이 있어 절벽도 새로운 길이 되었다.

<절벽을 걷다> EBS 다큐영화 < 길 위의 인생> 잔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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