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바다에도 길이 있다. GPS 따윈 필요 없다. 몸의 감각으로 익혀온 바닷길이다. 푸른 하늘에 둘러싸인 바다지만 미세하게 다른 차이가 있다. 어떤 방향과 각도로 뱃머리를 돌릴지, 머릿속에 새겨진 지도를 따라가면 된다. 망망대해에서 믿을 거라곤 자신뿐이다.

인도네시아 롬복 섬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말린키 섬은 전통적인 상어잡이 마을로 유명하다. 조네이드(57)는 40년 경력의 베테랑 상어잡이 꾼이다. 한 번 배를 타면 열흘 이상 바다에서 머문다. 그는 아들들에게 종종 말해왔다. "상어잡이는 바다 위에서 그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기다림의 미학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잡은 상어 조네이드씨가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건져올린 상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잡은 상어 조네이드씨가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건져올린 상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EBS


상어잡이는 기다림이다. 배를 부리는 솜씨나 배를 관리하는 기술보다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먼저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장남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 관례다. 조네이드씨는 아들 셋, 딸 하나를 뒀다. 하지만 장남에게 상어잡이 배를 물려주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5년 전부터 막내 니코(20)와 같이 배를 타왔다. 제법 능숙한 뱃사람으로 자란 막내에게 배를 물려줄 계획이다.

장남인 와르디(27)의 불만도 갈수록 쌓여 갔다. 그 역시 뱃사람이다. 남의 배를 빌려 바닷가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한다. 뱃삯과 연료비를 제외하면 손에 쥐는 수입이 별로 없다. 그래도 아버지는 막내에게 배를 물려주려 한다. 이슬람 사회의 관례를 따르지 않는 아버지에게 못내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아버지는 뱃일을 가르칠 때마다 화를 냈다. 아버지의 불호령을 맞을 때마다, 인내심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한 척의 배에는 눈앞의 생사가 달려 있다. 잠깐의 긴장도 늦출 수 없다. 조네이드씨는 엄격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다 큰 자식은 부모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큰아들과는 자꾸만 일이 틀어졌다. 그러나 막내는 달랐다. 가르쳐 준일을 제법 잘 따라 했다. 무엇보다 참을성이 있었다. 아무리 관례라지만, 위험한 가업을 무턱대고 장남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다.

막내인 니코는 이런 현실이 불편하다. 큰 형과의 사이도 서먹해졌다. 그는 다른 청년들처럼 자카르타 도시의 큰 공장에서 돈을 벌고 싶다. 바다의 푸른빛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몽고반점이나 다름없다. 섬에서 태어나 평생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답답한 마음의 얼룩 같은 것이다.

장남 대신 가업 물려 받는 막내

아버지와 함께 하는 마지막 상어잡이 어업을 하기 전, 아버지와 막내 니코가 함께 낚싯줄을 손보고 있다.

▲ 아버지와 함께 하는 마지막 상어잡이 어업을 하기 전, 아버지와 막내 니코가 함께 낚싯줄을 손보고 있다. ⓒ EBS


날씨가 맑다. 조네이드씨와 그의 동생, 막내까지 배에 오른다. 이번이 마지막 항해다. 40년 상어잡이 경력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외길을 달려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한번 출항하면 열흘 이상의 말미가 필요하기 때문에 배에 실을 짐도 만만치 않다. 롬복 섬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다. 상어 잡을 미끼와 저장 창고에 넣을 얼음, 배에서 먹을 찬거리며 배의 연료까지.

롬복 섬에서 출발해 두 시간 남짓 달리면,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허용한 상어잡이 지정구역에 도착한다. 먼저 미끼를 손질한다. 상어잡이 미끼로는 정어리나 고등어가 일반적이다. 생선을 자르고, 낚싯줄에 매달고,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부표를 던져 놓는다. 배 안에서는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무슬림 남자는 부엌일을 하지 않지만, 바닷길에서는 예외다.

니코가 식사 준비를 한다. 라마단 기간이라 저녁 6시 이후에나 식사할 수 있다. 어업 중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올리는 종교의 수칙은 엄격하게 지켜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께 올리는 감사의 기도는 잠시라도 멈출 수가 없다. 날씨가 맑은 것도, 조업을 나온 것도 모두 감사할 일이다.

날이 밝았다. 부표를 찾아 낚싯줄을 거둬들인다. 이번엔 헛수고다. 다른 어장으로 이동해볼 참이다.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할 차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낚싯줄에 걸려든 상어는 한 마리도 없다. 걱정의 한숨이 가슴에 차오른다. 열흘 치의 식비며 기름값이 눈앞을 오간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면, 고생만 하고 빚만 지는 셈이다. 푸른 물결 사이로 식솔을 책임지는 가장의 주판알이 쉴 새 없이 튕겨진다.

마지막 비상의 무기를 꺼낼 때가 됐다. 조네이드씨는 상어가 제일 좋아하는 쥐치를 미끼로 던져볼 생각이다. 쥐치의 껍질을 벗겨내는 손길에 달뜬 희망이 걸려든다. 하루 한 차례 던지던 낚싯줄도 그 횟수를 늘려본다. 조업 5일째 날이 밝았다. 낚싯줄을 끌어당기는데, 이번엔 제법 묵직하다. 동생과 막내까지 거들어 낚싯줄을 끌어올린다. 잡았다. 큼지막한 상어다. 몸길이가 2m에, 무게는 100kg 정도 됨직하다. 낚시꾼들에게는 전설의 물고기라 불리는 돗돔도 잡혔다.

어부의 일상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하는 식사 친지와 가족들과 함께 40년 바닷길 인생을 기념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하는 식사 친지와 가족들과 함께 40년 바닷길 인생을 기념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 EBS


만선의 꿈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40년 경력 어부의 체면은 세운 셈이다. 미끼를 던져놓고 기다렸을 뿐, 결과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 있었다. 오늘 빈손이라 해도, 내일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가 절로 솟아났다. 무엇이 잡힐지 몰라서 다시 바다로 낚싯줄을 드리웠다. 그 우연에 기대어 태산 같은 파도를 헤쳐 나왔다. 수없이 반복되는 우연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은 밤새 몸부림치다 지쳐버린 상어였다.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진다. 노련한 어부는 회항할 때를 결정할 줄 알아야 한다. 먹구름 앞에서는 어떤 잇속도 부질없다. 조네이드씨의 마지막 상어잡이는 이렇게 끝이 났다. 뱃머리를 돌린다. 먼저 롬복 수산 시장에 들른다. 상어는 지느러미 크기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 마지막으로 조네이드씨가 거머쥐는 고깃값이다. 마중을 나온 아내에게 미련 없이 돈을 건넨다. 그동안 그가 흘린 인내와 땀은 오직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아내 빌라드랍(56)씨가 남편을 위해 조촐한 잔치를 준비 중이다. 바닷길에서 무탈하게 어업을 마쳤으니, 이보다 큰 축복도 없다. 가까운 친지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다. 아까부터 첫째가 집 주위를 서성거리고만 있다. 그 서성거림이 무슨 의미인지 조네이드씨는 잘 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무게의 삶을 감당한다. 부족함이나 모자람을 비난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식사가 차려졌다. 막내가 형을 불러왔다. 그동안 가장으로써 고생한 아버지를 위해 감사의 말이 오간다. 갑자기 첫째 와르디가 아버지 옆으로 다가간다. 아버지가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은 부정할 수 없다. 아버지가 내린 결정은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아버지의 젊음이 가족을 위해 바쳐졌다면, 아버지의 노년은 자식들의 젊음으로 채워져야 하리라.

한 마리의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는 조네이드씨의 일상이었다. 수없이 던지고, 수없이 당겨보았던 낚싯줄의 무게가 그의 가슴에 새까맣게 타올랐다. 맏이가 아니라 막내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동안의 관례를 져버린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진실로 바라는 소망들은 조금씩 빗나가기 마련일는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두고 온 가족이 치러야 했던 가슴앓이도 아버지의 마지막 항해 앞에서 잠잠해졌다. 가족은 그런 것이다. 편지를 열어보듯 서로의 가슴을 말없이 읽어주는 것이다. 푸른 파도만이 일렁거리는 바다에도 자신만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거대한 상어를 끌어올리려고 몇천 번이나 이를 악물었을 아버지의 40년 세월 앞에서는, 어떤 갈등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줄 하나로 건져 올린 상어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아버지의 인생과 번민이 그 세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상어잡이 길 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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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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