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나온 정새난슬의 정규 앨범 제목이 '다 큰 여자'인 걸 보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엄연하게 성인이었고, 다 큰 여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게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성인으로서 인정해주는 통과 의례인 결혼과 출산까지 경험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이 '다 큰 여자'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연수는 1990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올해 27세.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2013년, 그녀가 24세 때 찍은 요구르트 선전에서였다. 그녀는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로 "너 나 좋아하지?"라고 묻는 남자에게 다 들켜버린 표정으로 "아니야, 아니거든!"을 반복하며 입술에서 넘쳐흐르는 하트 문양을 뱉고 있었다.

그녀의 캐릭터

'콩트앤더시티' 하연수, 꿀노잼의 꿀잼도전!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tvN 예능프로그램 '2015 도시공감' <콩트앤더시티> 제작발표회에서 '꿀노잼'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배우 하연수가 꿀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콩트앤더시티>는 연애, 결혼, 사회생활 등 20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재로 꾸려나가는 예능프로그램으로 도시인들의 행동양식을 공감코드로 담아낸 '도시 생태 보고서', 인간관계에서 누군가 삐치는 원인을 과학수사로 풀어낸 'BSI:서울', 현대인들의 미스터리한 경험을 살린 '파라노말X', 부성애를 스릴감 있게 그려낸 '테이큰:딸바보의 습격' 등의 코너로 구성된 공감코미디다. 30일 금요일 밤 11시 30분 첫 방송.

지난 2015년 10월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tvN 예능프로그램 '2015 도시공감' <콩트앤더시티> 제작발표회에서 '꿀노잼'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배우 하연수가 꿀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그녀는 어딘지 미숙해보이는 어린 얼굴로 약간은 둔하고 어리숙한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러다 <콩트 앤 더 시티>라는 tvN의 콩트 프로그램에 그녀가 출연한 건 2015년이었다. '진지병 환자인 하연수를 위한 유상무의 특급처방'이라는 제목의 콩트가 내 SNS에 떠서 별 생각 없이 재생해 보았다.

콩트는 '지나치게 진지한' 하연수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일차로 뜨악했던 건, 꽁트 안에서 좀 과장된 점까지 감안해도 딱히 하연수가 이상해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쾌한 농담을 하는 사람의 농담을 '사회적'으로 받아주지 않고, 불쾌함을 선명하게 표현하자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사회부적응' '진지병'이라며 입원치료를 시키다가 결국 허파에 구멍을 뚫어 세상에 다시 내 놓는다는 내용이었다. 꽁트를 보고 몹시 불쾌해진 나는 왜 그녀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하연수 진지병' 이라는 키워드로 찾아보다가 이차로 다시 불쾌해지고 말았다.

하연수는 반복적으로 '결혼해 주세요, 외조 잘 할 수 있어요' 같은 댓글을 다는 팬에게 단호한 어조로 댓글을 달아두었다.

"제가 올리는 게시물마다 결혼 결혼 하며 덧글 다시는 행동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네요. 훗날 미래의 진짜 부인되실 분을 생각한다면 이건 부끄러운 행동이지 않나요? 몇 살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라는 것을 뱉으시기 이전에 상대방 기분도 생각 바랍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이 댓글로 나온 기사도 여러 개였다. 사람들은 댓글 캡쳐를 옮겨다니며 "인성" "성격" "팬인데 너무했다" 는 말을 덧대고 있었다. 불쾌한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사람에게 '항의하지 말고 고맙게 받아들이라', '더 부드럽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대체 이것이 왜 진지병 같은 말로 놀림받아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연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하연수가 올린 미술작품 이름이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검색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의향이 없어 보이시니 말씀드립니다", 혹은 하프 연주회에 대해 올린 게시물에 달린 "하프는 너무 비싸서 좀" 류의 댓글에 "수천만 원대의 그랜드 하프와는 달리 켈틱 하프는 50만원 이하부터 가격대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잘 모르시면 센스 있게 검색을 해 보신 후 댓글을 써 주시는 게  다른 분들에게도 혼선을 주지 않고 이 게시물에 도움을 주시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라는 댓글을 쓴 게 문제였다고 한다.

하연수는 사과문에서 "미성숙한 발언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신 분들께" 사과한다고 말했다. 하연수의 사과문에서 내가 가장 모순적으로 느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녀의 발언은 조금도 "미성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냈고,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의 태도로 대답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고, 앞으로 자신에게 어떻게 대해줬으면 좋겠는지를 말했다. 이것은 조금도 "미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성숙한 인간이 타인을 성숙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태도다.

무엇이 '미성숙'인가

그녀의 태도가 "미성숙"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댓글들을 달고 있었다.

"아니에용~ 하프도 비교적 저렴한 것들 많이 있어요. 켈틱하프라고 불리는 종류가 입문하기에 적당해요! 전공자분들이 쓰시는 그랜드 하프는 말씀하신대로 가격이 수천만 원대라 ;ㅅ;"

"얼굴만 보면 사근사근하고 귀여울 것 같은데….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린가봐요?"

마찬가지였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회생활을 잘 모르는 하연수가 "싸가지 없고 오만하게" 말했고, "사회적으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하연수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이란 "말씀하신대로"를 붙여서 상대방의 주장을 긍정해주고, 애교스러운 말투로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나의 불쾌감은 일단 접어두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욕망과 불쾌를 접어두고, "공손하게" 타인을 추켜세우는 태도가 여성들에게 집요하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굳이 또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문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미성숙함"이야말로 "성숙함"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비단 하연수를 비롯한 여성 연예인에게만 강요되는 기준은 아니다. "똑똑한 여자보다 현명한 여자가 되라"는 수많은 여성 대상 자기개발서의 문장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사회는 여성이 인간으로서 성숙하길 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성숙한 여성은 "미성숙한 여성"이다.

성별 앞에서 이 사회는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마저 내던져 버렸다. 유아처럼 굴어야만 우리는 "사회적이고 성숙한 여성"으로 상찬받을 수 있다. 적당히 애교를 부려가면서 남들에게 미움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만이 "현명한" 여성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심지어 그것은 몇 살이 되건 변하지 않는다. 나이 스물인 여성도 나이 쉰인 여성도 자신의 욕망과 불쾌를 강하게 내세웠다가는 "현명하지 못한" "미성숙한"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취급받게 마련이다.

아마, '여자'라는 단어 앞에서 모두 이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당신이 연예인의 팬이건 무엇이건간에 타인에게 "미성숙한" 태도를 강요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미성숙한 척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놀랐겠지만, 당신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다 큰 여자다.

하연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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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씁니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혹은 그 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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