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올해 만 58세다. 한때 영화계에서 이름을 다소 알린 적이 있지만, 지금은 잊힌 감독이 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독립영화를 주로 한다. 나이는 환갑이 다 되었지만, 체력은 20대, 외모는 아직 40대 초반이라고 우기며 권토중래를 꿈꾸는 남자다. 오래전부터 그는 광주 5.18과 관련해 겪은 인생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 하던 차에, 항쟁 36주기가 며칠 안 남은 이번만큼은 꼭 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와서 그는 종종 얘기한다.

"광주 5.18은 내 인생에서 말이야, 영화 시나리오의 3막 구성으로 비유하자면, 본격적인 스토리 전개 부분인 2막을 여는 일종의 선동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아."

우습게도 그는 1980년에 광주에 있지도 않았고, 직접 5.18 항쟁에 참여한 사람도 아니다. 대학 시절 운동권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데모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은 있지만 앞장서진 않았다. 여기저기 의미 있는 단체들에 정기 후원하는 정도로 적당히 숨어있는 소시민에 가깝다. 대신 모든 참여는 영화로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영화인이다. 그런 그가 왜 광주 5.18민중항쟁을 자기 인생을 좌우한 중요한 사건이라 할까?

1970년대 전남 보성에서 중학교를 나와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사회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촌놈이었다. 순진하게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학교에서 배운 대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현실에서 적절한 한국적 민주주의 방식이라고 믿었을 정도였다. 1972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박정희가 붙었을 때, 벌교 인근의 고향 사람들은 김대중보다 박정희를 찍었고, 그의 아버지도 박정희를 찍었다.

그가 다니던 광주 전남고등학교엔 몇몇 진보적인 선생님들이 계셔서, 그분들을 따르는 학생들이 간혹 데모도 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고향 출신 친구나 친한 선후배 중에서도 운동권이 전혀 없었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더구나 사춘기였던 당시 그는 이런저런 콤플렉스로 인해 심하게 개인적인 방황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데 시선을 돌릴 여유도 없었다.

후에 5.18에 연루된 몇몇 전남대 운동권 친구들과 같은 반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그다지 친하게 어울리진 않았다. 그 무렵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영화관이었다. 중학교 때 태권도 선수였던 그는 이소룡의 무술 영화에 빠지면서 영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 자신이 영화판에서 잠시나마 주목받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시골 촌놈인 그로선, 그런 화려한 세계는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중학교까지 살았던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시골 마을

그가 중학교까지 살았던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시골 마을 ⓒ 정경숙


광주 밖의 그가 경험한 1980년

1980년 초, 그는 해남 화원반도 땅끝마을 해안 전경 초소로 인사 발령받아 근무했다. 그해 5월 18일 새벽, 각 초소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해안경비에 철저를 하라는 전통문(상급부대서 각 초소에 알리는 긴급통지문)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그와 동료들은 광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시로 내려오는 무선 전통문을 통해 광주에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당시 '광주사태'에 대해선 1970년대에 있었던 흔한 데모가 좀 과한 정도려니 생각했다. 그의 부대 전경들은 12.12에 대해 몰랐고,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듣지 못했으니까.

5월 21일쯤인가? 그는 평소처럼 자신의 초소 식량을 구입하러 목포 출장을 가게 되었다. 당시 그 해안 전경 초소는 9명이 생활했던 분초였는데, 식사는 분대원들이 직접 취사해서 먹고 있었다. 쌀과 반찬 등을 위한 부식비가 부대에서 내려오면, 주로 선임들이 읍내나 가까운 시내로 장을 보러 가곤 했다.

두 번째 고참이었던 그는 부식을 사기 위해 그날 오전 배를 타고 1시간 거리인 목포시로 나갔다. 목포시장에서 부식을 사고 나니 초소로 돌아갈 배 시간이 세 시간 정도 남았다. 그래서 사놓은 부식을 항구 앞 초소 단골 가게에 맡겨 놓은 뒤, 시내 중앙로에 있는 친구 집에 잠시 들르고자 했다. 가는 도중에 문방구에서 뭘 좀 살 게 있어 들렀는데, 이상하게도 주인이 그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다.

그 이유는 친구 집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인 친구 여동생이, 지금 광주에선 군인들이 총을 쏴 엄청나게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고, 그 최고 책임자는 전두환이라 말을 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아, 그래서 문방구 아저씨가 군인 복장에 싸늘하게 반응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는 배 시간이 다 되자 얼른 부두로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떤 택시도 군복 입은 그를 태워주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다 배를 놓치겠다 싶어 얼른 친구 집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사복을 빌려 입고 다시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니 목포역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기사 아저씨 말로는 광주에서 많은 시위대가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목포 시내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항구에 내리자마자 부식을 찾아 배를 향해 달렸다. 시위 군중들로 인해 택시가 더디게 운행하는 바람에 배 승선시간이 아슬아슬했기 때문이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화원반도로 향하는 배가 출항하려고 막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폴짝 뛰어 배 난간으로 올라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승선하게 된 것이다. 몇 초만 늦었어도 그는 6일간 초소에 못 들어가 탈영병이 될 뻔했다.

왜냐하면 이후로 모든 선박 출항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엄사에선 군인들의 실탄사격에 맞선 광주 시민들이 주변 지역 경찰서를 습격해 총기를 탈취하고, 목포 인근 섬 지역까지 손을 뻗칠까 봐 모든 선박 출항을 27일까지 막아버렸다.

가까스로 초소로 돌아온 그가 동료 대원들에게 목포에서 들은 얘기와 겪은 사건을 얘기했더니,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더구나 광주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반응했다. 어떻게 전쟁도 아닌데, 우리 군인이 단지 데모한다고 학생과 시민들을 죽여?

그날 밤 무전 통신문으로 '폭도들이 해안초소까지 몰려와 총기를 탈취하려 할 경우, 사격해도 좋다'는 내용이 내려왔다. 물론 공포탄을 먼저 쏘고, 생명 위협이 덜한 하반신을 겨냥하라고 했지만, 그와 분대원들은 모두 만일의 경우 '정말 쏴야 하나?'하고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전경 초소 9명의 분대원은 각기 M16 총기가 한 정씩 있어, 근무 시에는 항상 휴대하고 다녔었다. 대신 장전은 하지 않고 실탄 클립을 따로 휴대해 왔는데, 그 날 이후엔 상부 지시 때문에 모두 실탄을 장전하고 근무를 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라도 지역 어느 해안 초소도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그런 시도는 없었다. 당시엔 전라도의 모든 섬과 해안가는 전투 경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5.18을 전후에 북한 간첩들이 침투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광주 항쟁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당시의 사건은 정치인들과 신군부 간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중간에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이 억울하게 희생한 것 정도로만 이해했다. 일주일쯤 후엔가? 옆 초소에 전남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다는 여성이 면회를 왔는데, 그녀로부터 광주의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는 그 비극적인 사건을 전해 듣고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김대중이 격려해준 그의 첫 번째 5.18 영화 



그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5.18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책과 대학가에서 몰래 본 광주항쟁 다큐멘터리 덕분이었다.

감독 데뷔를 꿈꾸던 1989년 어느 날, 그가 우연히 책방에서 어떤 책을 보지 않았다면 5.18이 그의 인생에서 선동적 사건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본 책은 <광주의 넋, 박관현>이었다. 5.18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다가 감옥에서 단식투쟁으로 죽은 박관현 열사와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싸우다 죽어 5월 항쟁의 주역으로 평가받은 윤상원 열사의 실화가 담긴 책이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실제로 그들과 함께 야학활동을 하던 전남대 출신의 운동가인데, 그는 저자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동창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한 그는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해 만났다.

그는 데모 대신 영화로라도 현실 발언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노태우 정권 당시에 겁도 없이 5.18을 다룬 첫 상업극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를 공부한다는 핑계로 대학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역할도 못 하고 방관했다는 죄의식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그는 직접 쓴 세 페이지짜리 기획안 하나로 영화 공부하는 후배들을 모은 뒤, 시나리오를 쓰면서 제작준비에 착수했다. 기존 제작자에게선 투자받을 수 없었기에, 그는 후배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모은 3천 5백여만 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정권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지만,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검열에서 100분 중 거의 25분을 가위질해버려 사실상 개봉길이 막혔다. 그는 아직도 난도질당한 필름 통을 들고 나와 허탈하게 거리에 서 있었던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행히 그와 후배들이 야당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로비한 끝에 재심의를 받게 되었지만, 핵심 장면 3분 정도가 잘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 중앙극장에서 1991년 3월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

 그의 데뷔작 5.18 영화를 보고난 후 김대중 총재와 영화스탭. 배우들과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그의 데뷔작 5.18 영화를 보고난 후 김대중 총재와 영화스탭. 배우들과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 이정국


그때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십 명의 의원과 함께 와서 관람한 후, 밥도 사주고 금일봉까지 그에게 직접 주며 격려해주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극장에서 나온 수익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제작자이자 감독인 그는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영화법 위반으로 고발당해 벌금 100만 원을 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개봉 전해에 연세대 통일 대축제에서 심의 전 시사회를 했다는 이유지만, 사실상 간접적인 탄압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변호사 없이 혼자 정식재판을 청구해 법정에 선 그는 결국 벌금을 50만 원으로 낮췄지만, 항소를 포기하고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상업영화로선 최초로 5.18을 다룬 감독으로 잠시 언론 등으로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결국 30대 중반에 인생의 바닥에 떨어져 빈털터리가 된 그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2년간 광명시 변두리에 사는 후배가 공짜로 내준 지하 셋방에 살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2년 만에 또 다른 상업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때 만든 두 번째 영화로 그는 대종상에서 작품상과 신인감독상 등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주류 영화감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자신의 5.18 영화 재심의를 신청해 원형을 완전히 복원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 그 작품으로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승승장구한 그는 1997년 말에는 IMF로 힘든 국민들을 펑펑 울리는 신파 멜로영화 <편지>를 만들어, 다음 해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까지 세우며 잠시 유명세도 타기도 했다.

그가 또 다른 5.18 영화를 꿈꾸는 이유 

데뷔 후 10년쯤 지났을 무렵, 영상자료원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을 상영하는 회고 영화제에 열어준다 해서 뿌듯한 기분으로 참석하게 된 그는 자신의 데뷔작인 5.18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무리 초저예산이었다지만, 규모를 떠나 5.18을 피상적으로 다룬 데다, 너무 감상적인 스토리에 어설픈 연출로 만든 졸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필름을 아예 불태워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그는 데뷔작 5.18 영화의 실패 이후, 광주 5.18과 관련된 뉴스나 기사 등은 수년 동안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검열로 싸우는 과정, 흥행실패, 고발당해 법정을 몇 번 드나드는 등 고통스러웠던 상황들이 떠올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 많은 5.18 다큐멘터리가 공영방송에서 방영되었어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의 친형과 동생들, 동창들이 5.18 당시 광주에 살면서 항쟁 상황을 일부 경험했다는 것을 알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들에게 그 날의 상황을 물어본 적이 없다. 자신도 마치 5.18을 직접 겪은 사람처럼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데뷔작 5.18 영화 중 윤상원(이경영 배역)이 도청에서 연설하는 장면.

그의 데뷔작 5.18 영화 중 윤상원(이경영 배역)이 도청에서 연설하는 장면. ⓒ 새빛영화제작소


그러다 2010년쯤, 그는 북아일랜드인들이 영군 통치에 반발해 평화시위를 하던 중 영국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의해 10여 명이 사망한 1972년 데리시 사건을 영화화한 <블러디 선데이>(2002)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는 광주 항쟁 10일간의 치열한 과정을 리얼하게 그린 영화를 다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어설픈 데뷔작의 부끄러움을 제대로 만들어 상쇄해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물간 노장 감독이 되어 영화현장에서 잊힌 지 오래고, 대학에서 학생들과 어울리며 독립영화나 만들고 있었기에, 그런 영화를 기획해봤자 투자받고, 캐스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못 했다.

작년 2015년 봄, 그는 우연히 광주에서 갔다가 실제 윤상원 등과 5.18에 참여했던 전남대 출신의 한 작가를 통해 그동안 광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방대한 증언록을 접하게 되었다. 과거에 보지 못했던 책 20여 권 분량의 엄청난 증언 자료들을 몇 달 동안 모두 읽고 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광주와 관련 다양한 영상자료들도 모두 빠짐없이 수집해서 반복해 보기도 했다. 그런 후 드는 생각은, 어떻게든 광주 5.18 영화는 다양한 시각에서 영화화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10일간의 항쟁 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그동안 5.18 항쟁에 대해 가진 가장 큰 의문점은 5월 27일 계엄군이 쳐들어와 패배하고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증언록을 다 읽고서야 비로소 그 마음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특히 당시 윤상원 열사가 도청에서 시민군들에게 했던 마지막 연설은 그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전부가 총을 버리고 계엄군을 아무 저항 없이 맞아들이기에는 지난 며칠 동안의 항쟁이 너무도 장렬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민들의 저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도 누군가가 여기에 남아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야 합니다. 이건 광주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위 연설은 그가 5.18 데뷔작을 만들 때도 사용하긴 했지만, 깊은 이해 없이 기계적으로 인용한 대사였다. 이제야 그 느낌이 진심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실제로 많은 학자는 '5.18 민중항쟁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민주화는 없었을 것이고, 아직도 군부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그는 올해 초 100억 이상의 예산이 요구되는 대작이 될 5.18 영화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그 시나리오는 지난 5월 초 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 프로젝트 마켓에서 피칭 작품으로 선정되어, 많은 투자 및 제작자들을 상대로 피칭을 한 바도 있다. 그 기획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건 너무도 잘 안다. 일단 연출자가 충무로 현역으로선 고령인 60세가 다 된 한물간 감독이라는 것과 광주 5.18처럼 예민한 소재는 여전히 투자자들의 기피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5.18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뿌리 찾기'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 누구도, 1980년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조차도, 5.18 항쟁으로 인해 얻은 민주화의 소중한 자산을 누리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이순신의 해전을 영화화한 <명량>(2014)을 수많은 국민들이 보았듯이, 그는 우리 국민을 군부독재로부터 구한 광주 5.18의 시민들의 치열한 항쟁을 영화화해 전 국민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영화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세상의 바른길을 비춰주는 등대 역할은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술, 담배, 노래, 골프 등 또래 남자들이 좋아하는 그런 취미가 전혀 없다. 20대 초반 영화공부를 시작한 이후, 오직 영화만이 유일한 취미이자, 휴식이자, 대화의 수단이며, 궁극의 욕망이 된 그는 자신을 뼛속 깊이 순수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은 이정국이다.

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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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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