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앨빈은 어떻게 기억될까 지난 2015년 12월 1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토마스는 앨빈을 위한 송덕문을 쓰지 못해 괴롭다. 그리고 죽은 앨빈이 그의 머릿속에 찾아온다. 토마스의 기억 속 앨빈은 어떤 존재일까. 특이한 친구, 특별한 친구. ⓒ 곽우신


초등학교 1학년 핼러윈 파티 날, 토마스 위버는 종이로 만든 날개를 등에 붙이고 옷걸이를 구부려 만든 천사 머리띠를 단 채 <톰 소여의 모험>을 손에 들고 등장했다. 그가 무엇으로 분장했는지 반 친구들은 알아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한 명 앨빈 켈비만은 알았다.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에 등장하는 천사 클레란스로 변신했다는 것을. 클레란스는 죽은 앨빈의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천사였으니까.

앨빈은 그 세상을 뜬 엄마의 유령으로 분장했다. 머리에 핑크색 헤어 롤을 말고, 목욕 가운에 슬리퍼를 신고서. 하지만 역시 친구 중 아무도 알아맞히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혼자 있는 앨빈에게 토마스와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클레란스 천사님, 이쪽은 앨빈 어머니세요. 천사님의 엄청난 팬이시랍니다."

그렇게 두 친구는 서로의 "인생의 빛"을 마주하게 된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아래 <솜>)는 이 절친한 친구,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벌써 국내 세 번째 공연이다.

먼저 떠난 친구에게 바치는 송덕문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책을 찾는 주문 앨빈(이석준)이 토마스(고영빈)의 생일 선물로 줄 책을 찾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리고 이때 찾아준 책이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톰 소여의 모험>은 토마스의 인생을 바꾼다. 중극장만의 묘한 매력, 아름다운 무대, 모든 페어를 애정할 수밖에 없는 명배우, 피아노·첼로·클라리넷의 섬세한 삼중주, 그 선율에 얹어진 예쁜 가사까지 <솜>의 매력은 많지만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참 좋은 극이다. ⓒ 곽우신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지난해 12월 1일 시작해 오는 28일 마치는 <솜>은 토마스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갑작스러운 앨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급히 돌아온다. 장례식에서 그에게 바치는 송덕문을 낭독하기 위해서다. 어렸을 때, 누군가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이 떠난 이의 송덕문을 써주기로 두 친구는 약속했었다. 토마스는 어릴 적 앨빈이 선물해준 책 <톰 소여의 모험>으로 인해 작가를 꿈꿨고, 바람대로 현재는 "어마어마한 수상 경력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 있었다. 왠지, 슬프고도 감동적인 송덕문이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 친구의 송덕문을 쓰지 못했다. 한 글자, 한 단어를 고르는 것도 너무 힘들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는 "좋은 친구", "오랜 친구" 중 무엇도 결정하지 못하고 수식어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리에서 얼어붙은 강으로 뛰어내렸다는 앨빈. 마지막으로 본 게 고작 일주일 전 앨빈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사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지 꽤 됐다.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앨빈의 슬픔 마냥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앨빈(김종구)이지만, 사실은 가슴에 엄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다. 나이를 먹어도 할로윈 파티 때마다 엄마 유령의 복장을 입었던 앨빈은, 목욕가운에 남아 있을 엄마의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처음 그가 그 복장을 입었을 때, 천사가 되어 나타나 준 사람이 토마스였다. ⓒ 곽우신


자신의 책도 제대로 집필하지 못하고, 고작 짧은 송덕문도 완성하지 못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 죽은 앨빈이 등장해 인사한다.

"네 머릿속에 이야기만 몇 천 개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기억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책방. 토마스의 머릿속에 등장한 앨빈은 자신을 위해 토마스가 써줄 송덕문을 위해 둘 만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구석에 숨겨놓았던 기억을 앨빈이 꺼낼 때마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반가우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는 토마스. 이 둘이 함께 겪은 에피소드가 토마스의 머릿속에서 하나씩 재연된다. <솜>의 이야기 줄기는 토마스가 앨빈에게 바치는 송덕문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내 인생 이야기, 내 친구 인생 이야기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우리의 이야기 토마스(조강현)은 대학에 제출해야 할 단편소설로 어떤 걸 쓸까 고민하다가, 앨빈이 들려줬던 나비 이야기를 택한다. 그의 언어로 쓴 그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앨빈이 있었기에 쓸 수 있는 앨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을 형상화한 책방 형태의 무대에는 그 둘이 차곡차곡 쌓아왔던 이야기 몇천 개가 들어 있다. ⓒ 곽우신


이 과정을 통해서 <솜>이 말하고 싶은 주제는 간명하다. 극의 제목은 '내 인생의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이지만, 사실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씨실은 날실이 없으면 옷감이 되지 못하듯, 토마스가 단편소설을 완성해서 대학에 합격하고 이후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앨빈이 있었다. 토마스에게는 어휘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구조를 설계하는 기술이 있었지만, 그 기술로 써내려갈 글감은 모두 앨빈과의 추억에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앨빈이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머릿속에서 앨빈을 향해 소리 지른다.

"다 내 머릿속에서 나왔어. 내가 쓴 것들이야! 다 내가 썼어! 나 혼자서!"

그러고 보니 토마스의 슬럼프는 그가 더는 앨빈을 찾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시작됐다.

앨빈이 바란 건 토마스가 자신의 책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앨빈이 수상 소감을 전할 때 자신의 이름 한 번 언급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가 자신의 편지에 답장을 해주지 않아도 기다렸다. 언젠가 돌아와,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께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 바란 건 그 뿐.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이게 전부야 토마스(강필석)은 앨빈(홍우진)에게 묻는다. 왜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는지를. 하지만 앨빈은 명확히 답변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앨빈이 그토록 기다렸던 토마스가 자신을 찾아왔고, 토마스는 죽은 앨빈의 송덕문을 쓰며 약속을 지킨다. 오래도록 멈췄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졌다. ⓒ 곽우신


왜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을까. 토마스는 계속 물어보지만, 앨빈은 끝까지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 <멋진 인생>에 등장하는 천사 클레란스는 영화 주인공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하늘에서 나타나 구해준다는 것을.

"이게 다야. 이게 전부야. 참 즐거웠던 시간. 근데 잘 봐, 톰. 사실은 이게 끝이 아니야. 호수에 돌멩이 치는 물결같이, 멈추지 않고 시간 넘어 남아. 네 몫이야. 내 삶의 이야기는 다 네 거. 둘러 봐, 톰. 네 거야." -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No.16 이게 전부야(This is it) 중에서

나비와 바람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내 이야기가, 내 삶이, 내 성공이, 실은 내 옆의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나의 실패가 온전히 나의 탓이 아니듯, 나의 성공 역시 온전히 나의 공이 아니다.

"나는 나비죠. 중요치 않죠. 세상의 거대함 앞에 난 티끌과 같죠. 나비는 바다를 꿈꿨죠. 흰 파도 위를 날고 싶었죠. 하지만 파도 같은 건 너무 위험하기에, 바람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었죠. 바람은 엄청난 얘길 해줬죠. 내 몸의 힘은 공기의 흐름일 뿐, 그 작은 날개로 시작돼. 네 날개로. 너는 강한 나비야, 나의 힘이야. 네가 춤출 때 난 하늘 위로 날 수 있단다. 네 몸으로 공기 흔들며 그 춤을 출 때면, 그 날갯짓에 이 세상이 변해." -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No.07 '나비(The Butterfly)' 중에서

 지난 1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 완성된 이야기 토마스는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뒀던 <눈속의 천사들>의 원고를 죽은 앨빈의 도움으로 완성한다. 앨빈과 눈밭 위에서 늦은 12월의 햇살을 맞았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토마스의 인생은 토마스만의 인생이 아니라 앨빈과 공동소유의 인생이었다. 그 인생의 각 페이지가 모두 함께 써내려 간 이야기들이었으니까. ⓒ 곽우신


<솜>의 대표 넘버 '나비'는 말한다. 거대한 세상 앞에 초라한 나비 같은 우리이지만, 우리는 사실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 강한 존재라고. 작은 날갯짓으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나비처럼, 나비는 바람을 불게 한다. 그리고 바람은 나비를 저 먼바다까지 안내해줄 수 있다. 나비와 바람의 관계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돕고 도움받으며 세상에 맞설 수 있다. 우리를 티끌과 같은 존재 혹은 강한 존재로 규정하는 건, 우리의 이야기를 혼자 쓸지 함께 쓸지 결정한다. 나의 인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인 이유이다.

앨빈은 떠났지만, 이야기는 남았다. 토마스는 앨빈의 도움으로 송덕문을 완성한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는, 앨빈 켈리를 기억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가 앨빈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다시, 나비가, 바람을, 만났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포스터 3년만에 세 번째 공연에 나섰던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곧 막을 내린다. 지난 2015년 12월 1일 개막한 공연은 오는 28일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난다. 하지만 <솜>이 떠나더라도, 이 극이 관람객 각자에게 남겨준 이야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앨빈이 토마스와 함께 만들어나간 이야기처럼, 우리도 이 극을 통해 우리 삶을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는 누군가를 기억할 것이다. 나라는 나비를 위해 그가 바람이 되어준 것처럼, 그라는 나비를 위해 우리도 바람이 되어주자.

▲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포스터 3년만에 세 번째 공연에 나섰던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곧 막을 내린다. 지난 2015년 12월 1일 개막한 공연은 오는 28일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난다. 하지만 <솜>이 떠나더라도, 이 극이 관람객 각자에게 남겨준 이야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앨빈이 토마스와 함께 만들어나간 이야기처럼, 우리도 이 극을 통해 우리 삶을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는 누군가를 기억할 것이다. 나라는 나비를 위해 그가 바람이 되어준 것처럼, 그라는 나비를 위해 우리도 바람이 되어주자. ⓒ 오디컴퍼니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오디뮤지컬 앨빈 토마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