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방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아래 <응팔>)의 18화 분당 최고 시청률이 20%를 넘었다고 한다. 케이블 드라마로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청률이 오르는 동안 잃은 것도 많다. '여자주인공 덕선(혜리)의 남편은 누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광범위한 '어그로'를 끄는 동안, 캐릭터들은 처음의 설정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환은 18화에서 덕선에게 사랑한다 고백한 뒤 장난이라 무마했는데, 이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정환이 감정 표현을 최대한 자제했던 것과 매우 상반된다.

덕선의 캐릭터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모호하다. 정환과 택이 덕선을 좋아하지만 감정을 표출하지 않아 문제라면, 덕선은 그녀가 정확히 누구를 좋아하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다. 이성에 대한 감정뿐만이 아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1994년으로 훌쩍 뛰기 전인 1988년, 고등학생인 덕선은 그저 친구들과 평범하게 노는 것 이외의 무엇을 하지 않는다.

 주인공 덕선은 새 운동화 하나에 기뻐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주인공 덕선은 새 운동화 하나에 기뻐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 tvN


아이돌에 목숨을 걸었던 <응답하라 1997>(아래 <응칠>)의 시원(정은지), 초반부터 쓰레기(정우)를 향한 감정을 내비쳤던 <응답하라 1994>(아래 <응사>)의 나정(고아라)을 생각해볼 때, 덕선은 그래서 가장 답답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현실의 문제들쯤이야 쉽게 극복해 버리는 주체적인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열여덟 고등학생

드라마가 후반부에 이른 현재 덕선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이전까지 덕선은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였다. 택이라는 캐릭터가 주목받기 전인 드라마 초반, 덕선의 유력한 남편 후보는 선우(고경표)와 정환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선우의 모습을 오해한 덕선의 친구들이 덕선에게 건넨 "야, 쟤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한마디가 덕선 인생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그것이 오해였음이 밝혀진 뒤 이번에 덕선의 친구들은 정환을 지목하며 "쟤가 너 좋아해. 이번엔 확실해"라고 말하고, 덕선은 친구들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그때부터 정환을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보기 시작한다.

 친구들의 말에 덕선은 선우를 향한 첫사랑을 시작한다.

친구들의 말에 덕선은 선우를 향한 첫사랑을 시작한다. ⓒ tvN


주변 친구들의 말 한마디에 '정말 그런가?'하며 사랑을 시작하는 덕선은 분명 줏대 없이 휘둘리는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스물네 살이 되어서도 이렇다 할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덕선은, 그녀의 남편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보기에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 혹은 스물넷이라는 나이에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이 타인을 향한 연애감정일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의 연애감정은 아주 높은 확률로 덕선처럼 친구의 한 마디에 휘둘리고, 아는 사람이 보기엔 속 터질 정도로 꽁꽁 감춰진 채 조금씩 발전해 나간다.

꼴찌가 스튜어디스 된 게 그렇게 이상해?

 고3이 된 후 첫 진학상담에서 좌절하는 덕선.

고3이 된 후 첫 진학상담에서 좌절하는 덕선. ⓒ tvN


드라마의 배경이 1989년에서 1994년으로 바뀐 17화에서 논란이 된 것 중 하나는, 공부를 잘하기는커녕 좋아하는 것도 없던 덕선이 느닷없이 스튜어디스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오는 창밖을 보며 "I'm raining"이라고 말하던 1988년도의 꼴찌 덕선이 1994년에 이르러 친구 동룡(이동휘)의 영어 표현을 정정해주는 모습에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덕선의 변화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지 않은 제작진의 탓일 뿐이다. 관심사 하나 없던 고등학생이 전문직이 되는 일은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학력고사를 앞둔 1989년의 고3 덕선은 "꿈이 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빠, 난 꿈이 없어"라고 답하며 쓴웃음을 짓지만, 그렇다고 해서 20살 덕선이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어진 것이 이상하다고 말할 순 없다. 많은 고3이 같은 시기 덕선과 같은 고민에 부딪히고, 그들 중 다수가 덕선과 마찬가지로 그 후 새로운 분야에 흥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현실적인 '덕선'이라는 캐릭터

요컨대 덕선을 가리켜 공부도 잘하고(서울대 재학) 추구하는 가치도 뚜렷하며(운동권) 되고 싶은 것도 있는(사법고시 준비) 언니 보라(류혜영)처럼 주체적인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덕선은 평범한 사람이 겪는 성장 과정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덕선이의 시기를 지났거나, 지나고 있거나, 지나게 된다.

<응칠>의 시대적 배경이 주인공들이 고3이던 1998년에서 2005년으로 흐르는 동안 여자주인공 시원은 이런 내레이션을 한다.

"10대가 질풍노도의 시기인 건 아직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말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 답을 찾아 이리 쿵 저리 쿵 숱한 시행착오만을 반복하는 시기."

어쩌면 덕선은 시리즈를 통틀어 이 내레이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응답 시리즈의 판타지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고함2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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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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