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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양극화와 탐욕의 사회가 되다 보니 다른 것에 관심 둘 틈이 없다. 무관심이 세계화되고 있다'라고.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통치자를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일 아니에요?

미국만 해도 케네디의 죽음에 관해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이야기와 분석이 제기되고 있잖아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망각되고 있죠. 망각의 힘이 무서워요. 탐욕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다보니 다들 외면하고, 애써 잊는 거죠."

지난 1일, 백무현 화백이 맨 먼저 꺼낸 단어는 '망각'이었다. 그가 지금 싸우고 있는 대상은 노무현도, 이명박도 아닌 바로 '망각'임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망각이 거듭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고 있는 비정한 권력의 칼날들이다.

"노무현 수사를 맡았던 대검 중수부 우병우 제 1과장은 지금 청와대 민정수석이고, 중수부 제 2과장을 맡았던 사람은 노무현 정부 초기 평검사와의 대화에 나섰던 이석환 검사예요. 똑같은 이름이 계속 다시 호출되고 등장해요.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검찰이 어쨌다 저쨌다 하고 마는데, 괄호 안에 검사 누구라고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어요. 그냥 막연히 '검찰'이라는 식의 익명성은 망각을 부채질해요. 물론 검사들도 하나의 하수인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말이죠."

지금 그는 이인규 중수부장을 필두로 한 검찰과 한상렬 청장의 국세청, 그리고 '조중동'이라는 언론들이 이명박 정부의 총괄기획 아래서 삼각편대를 이루어 치밀하게 추진했던 '노무현 사냥'을 만화로 재현해내고 있다. 곧 출간될 책 <만화 노무현> 이야기다.

검찰·국세청·조중동의 '노무현 사냥'을 만화로

"23년째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시사만평이라는 게 지리멸렬한 면이 있어요. 한 칸이나 네 칸이라는 정해진 규격이 있고, 또 매일매일의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단행본은 서사구조가 있다 보니까, 팔다리가 잘린 시사만화와 달리 실체를 조곤조곤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봐요."

서울신문에서 만평을 그렸던 그는 지금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 중에서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 이들에 관한 만화책을 그리고 있다.
▲ 백무현 화백 서울신문에서 만평을 그렸던 그는 지금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 중에서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 이들에 관한 만화책을 그리고 있다.
ⓒ 이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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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신문의 시사만평을 그리며 꾸준히 단행본 작업을 병행해왔다. 1996년에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사> 1권을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2005년부터는 박정희, 전두환, 정주영, 김대중, 문재인 등 정치인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책들을 계속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노무현이다.

"무엇보다도 노무현이라는 인물의 집권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노론이 득세한 뒤로 아래로부터 권력이 교체된 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김대중 대통령만 해도 주류의 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노무현은 완전히 그 아래에서 올라선 경우였거든요. 물론 그걸 민중권력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확실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사건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기 동안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특별한 일들을 해나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바로 특권의 해체, 자기 권력의 포기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에 국정원장이나 기무사령관 대면보고를 못하게 했고, 검찰이나 국세청에도 독립적인 권한을 줬죠. 대통령부터 특권을 포기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흐름은 뒤집힐 수 없는 거라고 믿었죠.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모든 게 거꾸로 갔어요. 국정원장 독대가 시작됐고, 검찰은 스스로 정권의 칼이 됐어요.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그 비극적인 사건이에요."

거대한 변화를 거꾸로 돌려버린 과정에 대한 추적인 만큼, 취재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담당 기자나 노무현 대통령의 주변 분들, 또 그 밖의 여러 분들을 만나면서 취재했어요. 취재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민감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게 어떻게 된 사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요. 특히 노 대통령의 주변에 계셨던 어느 분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무래도 이명박 정권이 저희를 (희생양으로) 필요로 했던 것 같다'고."

당선자 시절 '전임 대통령을 존중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확실히 세우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광우병 의심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시작되고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하던 2008년 5월부터 돌변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기록물을 훔쳐갔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했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와 언론플레이로 압박했다.

"무섭게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였어요. 국정원과 국세청, 검찰이 한 몸처럼 움직였고 언론이 그걸 주고받았어요. 국정원이 흘린 정보를 '조중동'이 확대재생산하고, 그걸 빌미 삼아 검찰과 국세청이 나섰어요. 예컨대 SBS가 국정원이 만들어낸 정보를 가지고 '논두렁시계' 보도를 했고, 보도 관련자가 나중에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어요.

하지만 반대편은 완전히 아마추어였고 어리숙했죠. 모두 우왕좌왕했고, 많은 이들이 정권의 공작에 속아 함께 비난하는 쪽에 섰어요. <한겨레>나 <경향> 같은 매체들도 노무현을 꾸짖는 칼럼을 계속 썼죠. 노무현 대통령은 외로워했고, 또 상식과 탈특권 같이 자신이 세워놓은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했어요. 결국 죽음으로써 마지막 자존을 지키기 위한 저항을 한 거죠."

"박근혜·이명박 대통령은 아마 그리지 않을 거예요"

<만화 노무현>에는 유독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 <만화 노무현>에는 유독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 백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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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노무현>에 등장하는 노무현의 모습은 그래서 늘 어둡다. 늘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담배를 물고 있다. 봉하사저 앞에서 '대통령님, 나오세요' 하는 방문객들의 부름에 나아가 환하게 웃으며 답하던 모습은 많지 않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가볍지 않은 마음이었음이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거의 다 그렸는데, 마지막 대목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면, 사람이 밤에 꿈을 꾸는 시간은 2초에 불과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꾸는 꿈에 엄청난 이야기가 들어간다는 거죠. 노 대통령이 경호원을 돌려보내고 부엉이 바위에 혼자 앉은 그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분명하게 떠오르지를 않아요. 그게 떠오르면 마무리가 지어질 듯한데 …"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혹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많은 추측들도 제기된다. 타살설도 그 중의 하나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이미 노 대통령이 집을 나서는 시간에 권양숙 여사도 깨어 있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유서를 쓰거나 조작할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을 타살한다면 그것을 통해 '저쪽이' 얻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저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망신을 당하며 살아있는 것보다 죽었을 때의 이익이 훨씬 적었을 테니까요."

실제로 노무현은 죽었지만 노무현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을 죽인 '저쪽'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는 '친노'가 정치적 논쟁의 중심이라는 점은 오늘날 노무현의 현실적인 힘 상당 부분이 그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만화 노무현>은 그가 역대 대통령을 주인공 삼아 그린 네 번째 만화책이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대통령들을 그리고 있으며, 앞으로 그 주인공이 될 대통령은 누구일까?

"원래 제가 에두르는 것보다 '직구'를 던지는 걸 좋아해요. 사회문제를 다루려면 최정점인 대통령과 맞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나 이명박 대통령은 아마 그리지 않을 거예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아니고, 그저 탐욕 혹은 누군가의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만큼은 꼭 그려보고 싶어요. 우리나라 현대사의 '잘못 꿰어진 첫 단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만화 노무현> 역시 수많은 관련 인물들을 실명으로,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송을 비롯한 온갖 위협과 압력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송을 당할 각오는 이미 하고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전 의원 외에도 이인규, 한상률, 박준영, 김을동, 홍준표 … 실명으로 모두 다루고 있고, 그 중에 누군가는 아마 소송을 할 것 같긴 해요. 이미 전에 <박정희> 때도 박지만씨 측에서도 고소 협박을 받기도 했고, 또 '밤길 조심하라'거나 '니 배에는 칼 안 들어가겠나' 하는 협박들도 다 들어봤어요. 하지만 '팩트'니까, 그리고 진실이니까. 상관 없습니다. 좀 귀찮고 피곤해지긴 하겠지만요."

지역주의, 패거리정치, 밀실정치, 특권정치 등등. 한국정치의 병폐를 일컫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온상이자 거름이 되는 것은 바로 '망각'이다. 약속을 잊고, 결심을 잊고, 분노를 잊고, 스스로 잊었음을 다시 한 번 잊는 망각의 반복과 순환.

백무현 화백의 만화는 아마도 작지 않은 논쟁과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비극적이고 충격적이었던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기억들을 일깨우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의 망각증에 관한 경각심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논쟁과 갈등의 어느 편에 서 있는 이들에게든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의 그림은, 채 몇 장 되지 않는다.
▲ 동명이인 정치인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화가, 백무현 하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의 그림은, 채 몇 장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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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백무현 화백은 클라우드 소셜펀딩사이트 '굿펀딩'(http://www.goodfunding.net)에서 <만화 노무현> 출간 기금 마련을 위한 북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태그:#노무현, #백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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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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