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비교한 내용과 결과가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빤한 결론이 나오기 십상이어서 새로운 맛이 없거나, 진부하고 식상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혹은 비교대상이 아님에도 견강부회 식으로 비교하려 드는 바람에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경우도 적잖다.

그럼에도 비교하는 행위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비교할 만하다고 인정받는 대상이 설정되면 양자에 대한 명징한 이해에 도달하는 첩경을 제공한다. 이분법을 염두에 두면 확연해진다.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 같은 대립적인 존재를 연상하시라.

<스틸 엘리스>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비교한다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게 보인다. 일견 양자 사이에 어떤 대척점이나 친연성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을 비교하는 것은 두 여성이 21세기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양질의 질료를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영화와 기록영화

<스틸 엘리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의 영화다. 하나나 둘 정도의 주인공을 설정하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극적인 사건과 관계와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우리는 잘 나가는 스타 교수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 탁월한 내조자 엘리스가 맞이하는 느닷없는 비극적인 운명의 전변을 목도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치매 (알츠하이머)'가 그녀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쉰 살이란 젊은 나이에 말이다. 집안에 있는 화장실을 찾지 못해 선 채로 소변을 내지르는 엘리스의 비통한 표정은 사뭇 인상적이다. 저런 사건이 엘리스에게 닥칠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는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실존인물 비비안 마이어(1926-2009)에 대한 기록영화다. 마이어는 무명의 사진작가로 사망할 때까지 자기가 찍은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영화는 부동산 중개인이자 수집전문가 말루프가 마이어의 필름이 담긴 상자를 구입하게 된 경위부터 시작한다.

영화를 감독한 말루프는 마이어의 사진에서 범상하지 않은 기량을 확인하고 그녀의 일대기를 추적한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인 마이어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그녀의 고향마을을 방문하여 현장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것은 실존인물의 삶에 구체성과 현실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잉태한다.

대척적인 운명

<스틸 엘리스>는 지성인이자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엘리스의 바닥 모를 추락으로 요약 가능하다. 아이비리그의 명문 콜롬비아 대학 언어학부 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엘리스가 치매로 급전직하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점에서 예기치 못한 환란을 만난 엘리스가 겪어야 하는 비통한 운명.

화려한 명성과 은성한 파티 그리고 화목한 가정의 주인공 엘리스가 어떻게 치매와 만나고 싸우는지, 그것이 영화의 골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의 요건이 확실하게 마련된 셈이다. "유복한 자가 갑작스레 대면하게 되는 운명의 전변"이 엘리스를 찾아온 것이다.

반면에 마이어는 조용히 사라질 뻔했던 여성이다. 그녀의 저급한 사회적 지위와 은둔자적인 생활자세가 원인이다. 호기심 많고 눈 밝은 말루프가 확보한 마이어 사진의 작품성이 점차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마이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말루프의 안내로 더듬어 나가기 시작한다.

15만장의 사진을 남긴 작가이자, 신문수집에 열을 올렸던 수집광 마이어의 실체가 밝혀진다. 그녀의 사진 속 인물들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적절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마이어와 인물 사이의 교감과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뛰어난 사진작가 마이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좌절의 늪과 고독의 그늘

엘리스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과 실의의 나날을 보낸다. 최고의 지성을 가졌기에 치매의 진행속도가 일반인보다 현저히 빠르게 진행된다. 나날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인간답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조용히 끝장내는 길을 선택하려 한다.

영화의 설득력은 그녀의 선택마저 치매가 방해하는 장면에 있다. 저토록 깊고도 너른 망각의 심연이 치매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새어나온다. 동시에 영화는 엘리스가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힘을 보태는 인물은 고집불통 말썽꾼 막내딸 리디아다.

마이어는 주지하다시피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간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홀로였던 그녀는 언제나 외부와 높은 담장을 쌓고 살았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유모로 살았지만 그녀의 관심은 피사체로서 아이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애정이나 유대 같은 것을 심어준 적이 없는 인물로 확인된다. 

고독했던 그녀의 사진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녀 깊은 곳에 자리한 인간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 사진으로 표현된 것 아닐까. 가까운 대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무관심이 멀리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용을 잉태한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돌이킬 것인가

<스틸 엘리스>로 줄리안 무어는 2015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무어는 정평 있는 유명 연기자이지만 치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가족에게 주는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주안점은 치매로 무너져 내리는 개인과 파탄 나는 가정이 아니다. 어떻게 치매와 싸우는지가 관건이다. 

리디아가 체호프의 <세 자매>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야 해!"라는 대사를 반복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생의 굽이굽이에서 우리가 만나는 좌절과 절망과 실패에 무릎 꿇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허다한 난관과 시련을 응시하고 정면 승부하라는 것이 <스틸 엘리스>의 전갈이다.

은둔자이자 무명작가로 평생을 살았던 마이어에게서 빈센트 반 고흐를 연상하면 안 될까?! 살아생전 딱 한 작품을 팔 수 있었던 무명화가 빈센트. 하지만 오늘날 그림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인물은 단연 빈센트 아닌가. 시대와 불화하고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천재 빈센트.

마이어가 고흐 같은 위대성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야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고,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는 마이어의 삶은 고흐와 어지간히 닮았다. 뉴욕과 시카고를 넘어 유럽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이어의 사진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죽어서 되살아난 마이어.

<스틸 엘리스>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잔잔한 소품이다. 관객들이 좋아라하는 대중성 있는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에는 우리가 삶에서 놓치기 쉬운 요소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치명적인 질병, 자살충동, 가족애, 자아실현 욕망, 절연과 고독 같은 상호 모순적인 것들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삶의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기록영화 줄리안 무어 비비안 마이어 치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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