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의 배경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차지철 갈등설, 민주구국혁명설, 돌출행동설 심지어 건강이상설(다소 황당하지만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당시 김재규가 발기부전을 앓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10·26사건의 '먼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까지 현재까지도 다양한 설들이 충돌하고 있다.

여러 학설 중에서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가 미국개입설이다. 김재규는 10·26을 앞두고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특히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여러 차례 접촉했다. 미국 측은 김재규에게 '평화적 권력이동'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은근히 전달했다. 과연 미국은 10·26사건에 개입했을까?

미국은 10·26을 예상했나?

 김 부장은 긴급 국무회의에서 엊그제 글라이스틴을 만났다고 말한다

김 부장은 긴급 국무회의에서 엊그제 글라이스틴을 만났다고 말한다 ⓒ MK픽처스


"이북 애들 때문이라도 미국 애들한테 즉각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애즈 수운 애즈 파시블."
"벌써 위컴 사령관 측에서 제 사무실로 집으로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자식들 벌써 냄새를 맡았군. 빨라."
"정식 국무회의 때까지라도 일단 극비로 하겠습니다. 탑 씨크릿."
"미국 애들은 걱정할 것 없어요. 엊그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을 만났는데 게네들은 원래 각하를 안 좋아했으니까."
"이봐 그건 또 뭔 소리요. 미국이랑 미리 교감이 있었던 거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거사' 직후 김 부장은 육본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의 사망을 미국에 알려야 한다는 국무위원들에게 마치 미국과 사전교감이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판과정에서 김재규는 미국과의 사전교감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혁명의 목적 중에 하나를 "미국과의 관계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김재규는 자신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쓰레기 같은 소리"라며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1979년 11월19일 글라이스틴은 미국 국무부에 해명성 전문을 보냈다.

"박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이 한국에서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일본과 미국 언론은 미국이 박정희 정부를 비판한 것은 쿠데타 음모자들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김재규도 앞으로 재판에서 나와 나의 전임자들이 자신에게 박 대통령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는 주장을 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 내의 어떤 사람들이나 조직들에게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유지될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나는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박 대통령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우리의 비판을 오해하여 박정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든지 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미국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글라이스틴은 단지 한국인들의 '오해'라고 주장했지만 10·26사건에 미국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할만한 정황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1979년 10월25일 존 베시 미 육군참모총장은 아시아협회 주최한 '한미 발전하는 파트너십'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한관계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현재의 대한 협력관계를 냉전의 유산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고, 모두에게 장래의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10·26 전날 '특별한 사건'을 암시한 육군참모총장의 발언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1976년 CIA 한국지부장이었던 크루거는 텍사스대학에서 "만약 박정희가 1978년에 재차 당선된다면 임기가 끝날 때 살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10·26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에 박정희는 측근들에게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미국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터인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1979년 6월29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확인된 것만 세 번이나 글라이스틴을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에게 "현재의 헌법과 정치조직으로서는 평화적 권력이동을 다루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국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기도 했다. 훗날 거사 며칠 전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CIA한국지부장을 만났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2011년 1월18일 재미동포 안치용씨는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1973-1976년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 중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관련 전문 3건이 행정명령 또는 국무부 규정에 의거하여 비공개 처리됐다고 밝혔다.

그 중 두 건은 중앙정보부 차장 시절 작성된 것이고, 한 건은 1976년 12월20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미 국무부로 보낸 비밀전문이었으며 제목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의 면담'이었다. 김재규가 중정 부장으로 임명된 뒤 미국 대사관 관계자가 김재규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한 전문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김재규와 관련된 비밀문서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최근 김재규가 10월26일 오후2시에 글라이스틴을 만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와 만난 직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면담한 것이다. 사건 당일 김재규와 김영삼을 잇달아 만난 글라이스틴의 행보는 단지 우연일까? 이 같은 정황들은 미국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개입설이 상당한 지지받는 이유이다. 결국 글라이스틴은 사망 직전인 1999년 "미국은 10·26에 의도하지 않게 연루됐다"며 미국 개입설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박정희는 핵무기를 개발했을까?

 각하는 궁정동 연회에서 참석자들에게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각하는 궁정동 연회에서 참석자들에게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 MK픽처스


"요는 핵무장인데. 그래야 양키들이 껌뻑하거든. 어이 김 부장, 부토 알지. 부토. 아. 파키스탄의 무지랭이 독재자 부토. 그 놈아가 뭐라켔는지 알아? 풀을 뜯어 먹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는 반드시 가져야 되겠다. 이랬는기라. 와까따(이해가)"

각하는 궁정동 연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당수의 박정희 추종자들은 핵개발(혹은 자주국방)이 박정희와 미국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 같은 믿음이 마치 정설처럼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진명의 소설(말 그대로 소설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영향이 크다.

물론 박정희가 핵개발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미국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 것도 맞다. 하지만 1979년에 그것은 이미 지나간 문제였다.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원폭개발 계획이 1979년 무렵에는 핵재처리시설 도입의 포기로써 완전히 동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가장 큰 우려는 핵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였다. 글라이스틴은 1979년 6월20일 김재규와의 면담 내용을 정리해 도쿄에 있는 밴스 국무장관 앞으로 전문을 보냈다.

나는 오늘 김 부장을 만나서 단도직입적으로 카터·박정희 정상회담과 한국 내 인권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권향상을 상징하는 정치적 제스처가 있으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인권탄압으로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을 피해달라고 했다.

심각한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례로서는 몇 주 전에 있었던 카터 방한 반대 선교사들에 대한 위협, 김대중에 대한 행동의 자유 제약, 그리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상회담 이후에 있어야할 한국 정부의 바람직한 행동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포드 대통령의 방한 뒤에 있었던 탄압의 예를 들었다. 김재규 부장은 내가 말한 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1979년 9월15일 글라이스틴은 최광수 청와대 의전수석을 만나 "만약 한국 정부가 행동을 자제하지 않으면, 예컨대 김영삼을 구속한다든지, 혹은 최근 카터가 방한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을 구속하면 한국 정부의 이미지는 미국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인 입장 때문에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의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다수는 미국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5·18 당시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광주 시민들이 환호를 터뜨린 것도 미국의 긍정적인 개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5·18이후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우호적인 태도를 놓고 볼 때 미국이 단지 인권 문제 때문에 박정희와 틀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증폭시켰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팔레비 정권과 같은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중동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급변사태', 즉 혁명이 발생한다면 미국의 세계전략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평화적 권력이동'을 원했다. 미국이 박정희를 인권문제로 압박한 것도 '평화적 권력이동'을 위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사망 직전까지도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4·19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려서라도 계속 권좌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완고한 태도가 미국 정부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미국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결백(혹은 개입)을 증명할 수 있는 비밀문서들의 공개를 미루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10·26사건의 진실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미국개입설이 한국인들의 '오해'였는지 아니면 '합리적 의심'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나홀로연구소> http://blog.naver.com/silchun615에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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