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피겨스케이팅 김연아가 1월 23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챔피언하우스에서 열린 제22회 소치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여자 피겨스케이팅 김연아가 1월 23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챔피언하우스에서 열린 제22회 소치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한번 라이벌은 영원한 라이벌일까?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싱글 대회에 출전해 세계기록을 경신하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클린 경기를 펼친 대가는 쇼트프로그램 78.50점, 프리스케이팅 150.06점이라는 높은 점수로 보답받았다.

키스앤크라이존에 앉은 김연아는 점수가 발표되자 "오 마이 갓"을 외치며 놀라움을 드러냈고, 당시 중계를 맡은 SBS 배기완 아나운서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고 치켜세웠다. 함께 출전한 아사다 마오는 205.50점(쇼트73.78, 프리131.72)을 받아 은메달을 차지했다. 1위와의 점수차는 23.06점이었다.

같은 대회 남자 피겨스케이팅 싱글에서는 에반 라이사첵(미국)이 257.67점으로 금메달을, 예브게니 플루셴코(러시아)가 256.36점을 받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선수의 메달 색깔은 1.31점 차이로 갈렸다.

치열한 경우 소수점으로도 순위가 나뉘어지는 피겨스케이팅의 성격을 고려할 때, 23점은 상당한 점수 차였다. 228.56점 대 205.50점. 결과만 놓고 보면 싱겁게 끝난 듯하지만, 여자 피겨 싱글은 동계올림픽 전 종목을 통틀어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경기 중 하나였다. 경기 전부터 뜨거웠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눈만 마주쳐도 수백 개의 기사가 생산됐고, '상대 선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은 끊임없이 두 선수를 따라다녔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두 사람은 선수생활 내내 '동갑내기 라이벌'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로 승부가 갈렸지만 대결 구도는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4년이 흘렀고 지난 7일 소치동계올림픽이 개막했다.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론은 변함이 없다. '김연아 라이벌 목록'에 아사다 마오에 이어 러시아 신예 선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사다에서 리프니츠카야로, 순식간에 옮겨간 '김연아 라이벌'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연아가 선수로서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연아가 선수로서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 정혜정


이번 소치올림픽에는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여자 스키점프 등 12개 종목이 신설됐다. 그 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종목 중 하나가 피겨 단체전이다. 2013-2014시즌 국제 대회 점수를 기준으로 상위 10개국에 출전권이 부여됐고, 출전국 선수들은 남녀 싱글, 페어, 아이스댄싱을 소화했다. 네 종목의 결과를 종합해 순위를 매겼는데, 이번 대회에서 러시아가 우승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남자 싱글에 노련한 예브게니 플루셴코(32)를, 여자 싱글에는 신예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를 출전시켰다. 플루셴코의 선전을 예상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시니어 무대에 입성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소녀가 반란을 일으키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리프니츠카야가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며 단체전 우승을 이끌자 러시아 홈 관중뿐 아니라 우리나라 언론도 들썩였다. 김연아의 새 라이벌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2013-2014 그랑프리 시리즈 2차 대회와 유럽선수권에서의 우승이 전부인 리프니츠카야는 '10년 차 라이벌' 아사다까지 뒷전으로 밀어냈다. 리프니츠카야가 경기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연아와의 경기가 기대된다"고 말하자 김연아와 리프니츠카야를 엮은 기사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김연아, 올림픽 2연패 가능?' '아사다 마오, 트리플 악셀로 김연아에 도전' '러시아 신예, 김연아의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 등, 피겨 대회가 열릴 때마다 새로운 금메달리스트가 나올 때마다 언론은 김연아와 해당 선수를 비교하고 올림픽 메달 가능성을 예측하곤 한다. 마이크 앞에 선 김연아에게 기자들은 어김없이 라이벌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주목하는 선수는 국내 후배뿐"

2012년 7월 현역 복귀를 선언한 기자회견에서 나온 첫 질문도, 2014년 1월 소치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마지막 미디어데이 마무리 질문도 선수 개인 목표나 기량이 아닌 '라이벌이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 소치올림픽에 가겠다고 결정했는데, 러시아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는가? (2012년 7월 2일, 현역 선수 복귀 기자회견 첫 질문)
"러시아 선수들은 김해진 선수나 박소연 선수 같은 후배들의 경쟁상대이기 때문에 눈여겨 봐오긴 했는데요. 저는 이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목표보다는, 우선 소치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월드챔피언십에 나갈 수 있도록 훈련을 할 거고요. (후략)"

- 라이벌 혹은, 주목하고 있는 선수가 있는가? (2014년 1월 15일, 소치올림픽 빙상대표단 미디어데이 기자회견 마지막 질문)
"특별하게 주목하는 선수는 이번에 같이 출전하는 김해진·박소연 선수입니다. 밴쿠버올림픽 때는 곽민정 선수랑 같이 나갔지만, 그때는 한 명이었고 이번에는 두 명의 후배 선수들과 같이 출전하게 됩니다. 이 선수들이 앞으로 시니어 무대에서 계속 대회를 치르게 됩니다. 이번 올림픽이 심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큰 기회인 만큼, 부담이 되겠지만 선수들이 좋은 인상을 남기길 바랍니다. 제가 은퇴한 뒤에도 한국에 이런 선수들도 있다는 것을 심판들이 기억을 하고, 앞으로 시니어 대회 출전할 때 많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연아는 '라이벌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특정 선수를 거론하지 않은 채 답변을 이어갔다.

김연아 vs. 김연아

 2006년 시니어 데뷔 이후 김연아는 열한 번의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2006년 시니어 데뷔 이후 김연아는 열한 번의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 희재


김연아는 시니어 데뷔 첫해인 2006-2007시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록산느의 탱고'(El Tango de Roxanne)를 실수없이 연기해 쇼트프로그램 세계신기록을 작성했다. 2008-2009시즌에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와 '세헤라자데'(Scheherazade)를 연기해 여자 선수 최초로 200점을 돌파했다. 이후 밴쿠버올림픽까지 쇼트, 프리, 합계 점수에서 모두 열한 번의 기록을 경신했다. 김연아는 국내대회는 물론이고 출전한 모든 국제대회에서 3위 내에 입상해 피겨 1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올 포디움(All-Podium)을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

기록을 들여다보면 김연아의 경쟁자는 김연아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은 김연아의 맞은 편에 상대 선수를 세워두고 둘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극했다. 2012년 7월 현역 복귀를 선언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김연아는 언론 앞에서 한 가지 목표만을 이야기해왔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수로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어 소치올림픽 출전을 결정하게 됐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기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올림픽 2연패를 언급하고, 그의 금메달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는 말이 있다. 왕관을 내려놓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연기를 하겠다는 선수와 달리, 오히려 주변에서 왕관을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형국이다.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리프니츠카야의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피겨 여왕의 마지막 무대를 즐기기란 '1등 지상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불가능한 것 일까?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를 2위로 마친 김연아는 <SBS 스페셜- 아이콘 김연아, 2막을 열다>에서 아쉬운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보통 경기가 끝나면 문자나 축하메시지가 많이 오잖아요. 그런데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하나도 못 받았어요. 저는 그게 정말 어이가 없는 거예요. 저는 2등도 했고, 경기가 끝나서 기분이 정말 좋았는데, 다 '수고했어, 괜찮아'라는 말밖에 없는 거예요. '스포츠 선수에게 있어서 1등과 2등은, 1등과 꼴등과 같은 취급을 받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디오스 김연아

 대회에서 2등을 하고 돌아오자 주변에서 축하가 아닌 위로의 말을 전해 아쉬웠다는 김연아

대회에서 2등을 하고 돌아오자 주변에서 축하가 아닌 위로의 말을 전해 아쉬웠다는 김연아 ⓒ SBS 화면캡처


3년 전에도, 지금도, 김연아는 금메달을 따려고 시합에 출전하는 것은 아니다. 매번 자신이 정한 목표를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목표는 올림픽 티켓 두 장 이상 획득이었고, 이번 소치올림픽 목표는 선수 생활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김연아는 올림픽 시즌 프로그램으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와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를 택했다. 이제 완전한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무대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20일 쇼트프로그램, 21일 프리스케이팅). 작별 인사를 하는 그에게 메달을 강요하지 않기를, 어떤 결과를 얻든 박수를 보낼 수 있기를, 그가 웃으면서 경기장을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아디오스,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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