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는 과거 청소년이 선망하는 직업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가수의 뒤에서 춤을 춘다고 하여 '백댄서'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음악'으로 발전한 요즘은 무대의 구성과 안무가 중요해짐에 따라 댄서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연예기획사에서는 음반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댄서들의 의견을 묻고 콘셉트를 정하기도 한다. <오마이스타>는 연예인에 비해 덜 알려진 댄서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K-POP의 나라에서 댄서로 산다는 것'을 짚어본다. <편집자 말>

나는 댄서다 그룹 신화의 안무를 담당하는 댄스팀의 박용규씨가 1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연습실에서 <2013 신화 그랜드 투어 "더 클래식" 인 도쿄> 콘서트를 앞두고 시범을 보이고 있다.

▲ 나는 댄서다 그룹 신화의 안무를 담당하는 댄스팀의 박용규씨가 1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연습실에서 <2013 신화 그랜드 투어 "더 클래식" 인 도쿄> 콘서트를 앞두고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이정민


|오마이스타 ■취재/이언혁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까지 다녔던 남자. 성당에서 춤추던 친구들을 따라 하던 게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때 '무용단 모집' 공고를 보고 아르바이트 삼아 췄던 춤은 어느덧 그의 일상이요, 직업이 되었다.

그룹 신화의 댄서로 이미 팬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인 박용규씨(37)의 이야기이다. 무용단 소속으로 행사를 위주로 했던 박씨는 그룹 태사자의 댄서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방송 댄서 생활을 하게 됐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댄서를 '천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었다. 밤새워 일하면서도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기 일쑤였다. 다른 일을 찾다가 뮤지컬계에 발을 들이면서 <토미><웨스트사이드 스토리><누구를 위하려 종을 울리나> 등에 출연했다. 댄서와 뮤지컬 배우의 생활 패턴이 달랐던 탓에, 그는 연습실 지각대장이었다. 결국 2년의 외도 끝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 맡게 된 가수가 바로 신화였다. 지난 2003년, 1개월에 걸쳐 이민우의 솔로 1집 'Just One Night(저스트 원 나잇)의 안무에 참여했던 박용규씨는 이후 신화 멤버들과 10년을 보냈다. 팝핀현준의 안무를 맡아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동완, 신혜성의 소속사 라이브웍스컴퍼니 이장언 대표였다. "시작해야 해. 안무를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그 뒤로도 이 말은 박씨를 따라다녔다. 신화가 4년 만에 다시 뭉치던 때도 그랬다.

"정신 차려 보니까 다시 와 있더라고요.(웃음) 2012년 멤버가 거의 최강이었어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다 모였거든요. 콘서트 스태프들도 그랬고요. 서로를 잘 아니까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신화 멤버들은 스타일이 있어요. 특히 (김)동완은 연습실에 일찍 와서 정말 연습을 많이 해요. 멤버들이 1명씩 와서 배우고, 나중에 다 같이 춤을 추는데 저는 끝까지 서 있어요.(웃음)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만 '형밖에 없다'는 소리 들으면 보람 있죠."

 그룹 신화의 콘서트를 앞두고 포즈를 취한 댄스팀. 왼쪽부터 김윤한, 고수봉, 박준희, 박용규씨

그룹 신화의 콘서트를 앞두고 포즈를 취한 댄스팀. 왼쪽부터 김윤한, 고수봉, 박준희, 박용규씨 ⓒ 신화컴퍼니


신곡 1곡을 1개월에 걸쳐 연습하고 나면, 정작 활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노래에 질려버린다. CD를 받아도 듣지 않을 때가 많다고. 박용규씨는 댄서로 활동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때를 묻자 "2012년 신화의 아시아 투어 서울 공연에서 오프닝 무대를 선보일 때"라고 답했다. 오프닝 영상에 담긴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184cm의 큰 키에도 몸무게가 65kg을 넘어본 적이 없다는 박씨는 "정말 뿌듯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K-POP이 주목받으면서 국외 스케줄은 많아졌지만 오히려 국내에서 설 무대는 예전보다 줄었다. IMF 전에는 행사가 많아서 어쩌다 하루만 쉬어도 감지덕지했는데 행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또 안무팀을 무대에 세우기보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무대를 꽉 채우는 게 요즘의 추세인 탓에 직접 춤추기보다 아이돌을 기획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곤 한다. 박용규씨는 "옛날 환경이 훨씬 좋았다"고 했다.

"1995년~1997년, 방송에 출연하면 (가수 측으로부터) 회당 15000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회당 7만 원을 권장하고 있고요. IMF 전에는 방송사에서 지급하는 보조출연 바우처가 1인당 10만 원씩 나왔는데 IMF 이후에는 사치라며 다 사라졌어요. 가수들은 급에 따라 최소한이라도 받는데, 저희는 지금까지 다시 생기지 않네요. 얼마 전에 사단법인 방송댄스협회가 생겼는데 처음으로 하려는 일이 방송 바우처 부활입니다."

마흔을 앞둔 박용규씨는 "이제 동생들에게 물려줄 때가 됐다"고 했다. A&R을 공부하다가 신화의 컴백으로 잠시 멈췄다는 그는 "꾸준히 활동하며 치열하게 살아남으려고 노력했기에, 동생들에게는 조금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 보면 기분이 참 그래요. 제 선택을 후회할 때도 있고요. 친구들은 뭐라고 하냐고요? '넌 네가 좋아하는 거 하잖아. 네가 부럽다'고 하던데요.(웃음)"

댄서, '무대 소품'에서 'K-POP의 중심'으로 

나는 댄서다 그룹 신화의 안무를 담당하는 댄스팀의 고수봉씨가 1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연습실에서 <2013 신화 그랜드 투어 "더 클래식" 인 도쿄> 콘서트를 앞두고 시범을 보이고 있다.

▲ 나는 댄서다 그룹 신화의 안무를 담당하는 댄스팀의 고수봉씨가 1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연습실에서 <2013 신화 그랜드 투어 "더 클래식" 인 도쿄> 콘서트를 앞두고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이정민


"아...그러면 무직이시네요."

카드회사 상담사는 그에게 "프리랜서 개념이지만 결국은 무직"이라고 말했다. 이동통신사 상담사도 똑같았다. K-POP 열풍과 함께 댄서를 향한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사업자등록증을 내걸고 팀을 꾸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프리랜서'요 '무직'으로 불린다. 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 댄서 고수봉씨(36)는 스스로 "아직까지는 불안정한 상태"라고 밝혔다.

고씨에게 춤은 운명이었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장기자랑 시간에 나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TV에 나오는 가수와 댄서들의 무대를 녹화했다가 돌려보며 따라 하곤 했다. 그렇게 춤은 취미가 되었고, 아르바이트가 되었다가 이내 직업이 되었다.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그는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게 참 딜레마"라고 털어놨다.

"한 번은 쉴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으니까요. 15년 전쯤에는 중, 고등학생의 직업 선호도 1위가 댄서였어요.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그렇지 현장에서 받는 대우 등은 미약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무대 소품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요. 군대에 다녀와 20대 중반이 됐을 때, '잘하고 있는 건가' '춤을 계속 춰야 하나' 싶더라고요. 회의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제 와서 생각하면 누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더라고요."

지난 1998년 나나스쿨에 들어온 고수봉씨는 핑클과 쿨, 김건모, 코요태, 젝스키스, 채정안, 이정현, 샵 등 2000년대 초 댄스가수들의 댄서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서인국, 빅스 등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무대에 섰다. 지난 2008년 신화의 10주년 콘서트에도 참여했던 그는 이후에도 신화가 활동할 때마다 함께하고 있다. "컴백 소식이 들리면 '이제 전화가 오겠구나' 싶다"는 그는 "나올 때마다 찾아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나는 댄서다 그룹 신화의 안무를 담당하는 댄스팀이 1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연습실에서 <2013 신화 그랜드 투어 "더 클래식" 인 도쿄> 콘서트를 앞두고 안무를 맞춰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신화의 콘서트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안무를 맞춰보는 댄스팀 멤버들. 왼쪽부터 박준희, 고수봉, 박용규씨 ⓒ 이정민


댄서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비행기 한 번 타봤겠느냐"고 눙을 친 그는 "일이지만 참 많이 돌아다닌다"면서 "아마 난 한 군데서 직장생활은 절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매번 다른 무대에 서며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팬들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늘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물론이요,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은 각자의 팀에서 활동하는 댄서들이 프로젝트 개념으로 모여서 공연하는 일이 많아요. 여러 팀과 일하다 보니 스케줄을 맞추면 거의 밤이죠. 일반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웬만해서는 약속을 잘 못 잡고, 음악방송이 있는 주말에 더 바쁜 직업이기 때문에 가족모임에 참석해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어요. 이제는 부모님도 편하게 대해주셔요. 일 있으면 제 스케줄을 먼저 챙겨주시고요. 한편으로는 죄송스럽죠. 제가 챙겨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걸 못하니까요."

고수봉씨에게 애착이 가는 그룹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쿨을 꼽았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하면서 '끝까지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마냥 고마웠는데 지금까지 계속 하니까 믿음이 간다"고 했다. 고씨는 "처음엔 형들이라 어려웠지만 제일 오래 같이하면서 이제는 속에 있는 이야기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다"면서 "안무팀뿐만 아니라 스타일리스트 등 다른 스태프들도 예전에 하던 이들과 계속 하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춤을 추려면 안무팀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하지만 매체와 영상 등이 점차 발달하면서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고씨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생들이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정규직이 아니니까요. 돈도 많이 벌고 싶어요.(웃음)"

나는 댄서다 박용규 고수봉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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