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철북> 오스카의 부모 마체라트와 아그네스, 그리고 아그네스의 애인인 얀의 모습. 오스카는 주변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다.

▲ 영화 <양철북> 오스카의 부모 마체라트와 아그네스, 그리고 아그네스의 애인인 얀의 모습. 오스카는 주변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다. ⓒ Franz Seitz Film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이 유명한 말은, 중간적 입장에 선 자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중립이란 중도적 정치관이라기보다는 '중립을 표방한 방관'의 개념에 가깝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저주를 받을 정도로,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는 태도는 언제나 경멸적인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방관자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오히려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간의 대립이 극렬한 시기일수록 그들의 존재는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격동기를 다루는 작품들에서는 방관적인 성향의 인물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들을 둘러싸고 설정된 상황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어느 이야기에서나, 대개 줏대 없고 겁이 많은 인간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들은 눈치를 보며 참여를 회피하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마지막 순간 유리한 쪽으로 움직인다. 방관적인 태도의 근본적 원인을 개인의 성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방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비겁한 성격의 결과이고, 방관자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독일 영화 <양철북>(1979년)은 이 논리구조를 뒤집는다. 직접 참여를 회피하는 태도가 위험하다고 보는 시각은 같지만, 이 영화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 방관자가 되는지를 섣불리 정해두지 않는다. 대신, 방관을 선택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 위험을 생생하게 경고한다.

'더 자라고 싶지 않아!'... 아이의 몸을 선택한 오스카

영화 <양철북> 단치히에서 나치의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날. 오스카는 무대 뒤에 숨어 양철북을 두들기고, 그 탓에 악대가 엉뚱한 음악을 연주해 집회는 엉망이 된다.

▲ 영화 <양철북> 단치히에서 나치의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날. 오스카는 무대 뒤에 숨어 양철북을 두들기고, 그 탓에 악대가 엉뚱한 음악을 연주해 집회는 엉망이 된다. ⓒ Franz Seitz Film


영화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폴란드령 단치히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다양한 민족이 뒤섞인 이 도시에서, 주인공 오스카(데이비드 베넨 분)는 독일인 마체라트와 카슈비아인 아그네스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나 둘 목격하면서 차츰 어른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선택하고 높은 층계에서 스스로 뛰어내린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오스카는 계속 아이의 몸으로 남는다. 비겁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해 세상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기회주의적 방관자'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이 구분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요소는 그의 양철북이다. 오스카가 늘 메고 다니는 조그만 장난감 양철북은 두드리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이는 그가 방관자의 입장에 있음에도,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어른이 되는 것은 거부했지만, 영화의 초반부에서 오스카는 특기인 고음과 양철북을 통해 세상에 대한 그의 불만을 뚜렷하게 표현한다. 높은 소리를 질러 유리창을 깨뜨려서 부모의 불륜행위를 방해하거나, 양철북을 시끄럽게 두들겨 나치의 집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식이다. 주변의 문제에 대한 의식이나 용기가 없이, 일신의 안위만을 위하던 기존의 방관자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결과에는 변화가 없다. 그의 양철북 소리는 현실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오스카의 생모인 아그네스는 내연남의 아이를 임신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치는 단치히에 당당하게 입성한다. 제아무리 성숙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아이'라는 방관자 입장에 서 있는 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괴리는 시간이 지나 오스카의 내면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커지고, 그의 갈등도 깊어진다. 아이의 몸을 택함으로써 어른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스스로 느끼는 어른의 감정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방관자의 삶,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고...

영화 <양철북> 자라지 못한 어른이라는 동질감에 난쟁이 서커스단과 금방 가까워진 오스카는, 곧 그들을 따라 독일군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양철북은 나치를 즐겁게 하는 오락물로 전락한다.

▲ 영화 <양철북> 자라지 못한 어른이라는 동질감에 난쟁이 서커스단과 금방 가까워진 오스카는, 곧 그들을 따라 독일군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양철북은 나치를 즐겁게 하는 오락물로 전락한다. ⓒ Franz Seitz Film


한동안 괴로움에 시달리던 오스카는 우연히 난쟁이 서커스단을 만나고, 곧 그들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는 짧은 시간에 그들과 가까워지고, 급기야 자신이 과거 나치를 혐오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커스단이 운영하는 독일군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한때 나치를 방해했던 양철북 소리는, 삽시간에 그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로 전락한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은 문제의식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방관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남달랐지만,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 분명히 사태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뛰어들기를 거부했던 오스카는, 결국 누구에게도 그의 불만을 인정받지 못해 갈등하다가 시류에 휩쓸린다. 그 결과 그는 초기의 신념도, 주변 사람들도 지켜내지 못했다.

위문공연단으로 오랜 기간 각지를 떠돌던 오스카는 전쟁의 끝 무렵 사랑했던 여인을 폭격으로 잃은 채 고향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종전을 맞는다. 곧이어 승전국인 소련의 군대가 들어와 도시의 나치 잔당을 수색하고,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오스카의 아버지 마체라트는 허겁지겁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스카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소련군 앞에서 마체라트의 손에 나치의 배지를 쥐여준다. 이는 이야기 내내 자행된 위선과 거짓의 행위들에 대해, 오스카가 취한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다. 이 행동으로 인해 마체라트는 소련군에게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말미, 폐허가 된 공동묘지에서 마체라트의 장례식이 진행된다. 오스카는 메고 있던 양철북을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 속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성장하기로 마음먹는다. 방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당신이 '양철북'을 내던져야 할 때

영화 <양철북>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의 무덤에 양철북을 버린다.

▲ 영화 <양철북>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의 무덤에 양철북을 버린다. ⓒ Franz Seitz Film


이 영화는 방관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실 참여의 결여가 가져오는 위험까지를 경고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불만을 표현하더라도 직접적인 사회참여를 병행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기회주의적인 방관이 가져오는 그것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불만은 높아지지만 변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이는 영화 안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실재하는 일이다. 과거에 비해 불만을 표출할 기회와 수단이 무한히 늘어나고,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의식하는 수준도 높아졌지만 변화를 위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소수다. 그렇기에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현실조차,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불만족은 변화를 위한 움직임의 불씨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기분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꾸고자 한다면 직접 나서야 한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변화를 위해 나서는 것은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그리고 이제 목에 건 '양철북'을 내던지기를,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세상에 당당하게 뛰어들기를 바란다.

양철북 귄터 그라스 폴커 슐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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