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은 여행에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여행의 기술자'는 여행지를 천천히 돌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는 사람이다. 외국여행을 몇 번이라도 다녀온 이들은 알랭 드 보통의 견해에 공감할 것이다. 외국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을 때 비행기 시간에 쫓겨 몇 군데만 빨리 보고 공항으로 향한 경험은 여행자에게는 가장 짜증 나는 기억이다.

 KBS 여행 다큐멘터리 걸어서 세계속으로.

KBS 여행 다큐멘터리 걸어서 세계속으로. ⓒ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관심사는 일상의 풍경

KBS의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여행에서 만끽할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란 타이틀에 걸맞게 프로그램 속에서 담당 PD는 HD 6mm 카메라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 세계 여러 도시가 가진 독특한 숨결을 담아낸다. <걸어서 세계속으로>에는 외국의 유명 관광지나 역사 유적지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의 주요 관심사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이다. 느리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는 것은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가진 장점이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사실상 PD 혼자서 제작하는 여행 다큐멘터리다. 6명의 담당 PD는 한 주씩 돌아가면서 프로그램의 기획, 촬영, 편집, 원고 작성 등 제작의 모든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화면 구성이나 해설이 철저히 1인칭 관점에서 진행된다. 때로는 PD가 직접 축제에 참여하기도 하고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가정에 초대되어 식사를 함께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행자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돌발 상황과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프로그램 중간에 삽입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몰입을 돕기 위한 장치다. 이런 장치 덕분에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여행하는 듯한 착각이 느껴지기도 한다.

뛰어난 배경음악 선곡 역시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2005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매회 각 나라의 느낌과 어울리는 음악들을 찾아낸다. 여행한 국가의 전통음악이나 대중음악부터 일반적인 팝 음악까지 선택의 폭은 매우 넓은 편이다. 음악에 대한 시청자들의 질문이 쇄도하자 제작진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선곡된 음악 목록을 게시하고 있다.

 지난 21일에는 '자유, 자비를 만나다 - 태국 수린섬' 편이 방송됐다.

지난 21일에는 '자유, 자비를 만나다 - 태국 수린섬' 편이 방송됐다. ⓒ KBS


토요일 오전 시간대, 경이적인 시청률 11.3%

지난 21일 방송된 '자유, 자비를 만나다 - 태국 수린섬' 편에서도 이런 특징들이 잘 드러났다. 지난주 방송을 담당했던 안성진 PD가 태국에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재래시장이었다. 안PD는 태국의 수상시장에서 배를 타고 다니며 가격 흥정을 통해 직접 물건을 샀다. 그는 흥정에 성공해 상인들이 처음 불렀던 가격의 반값에 셔츠를 얻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그가 떠난 곳은 태국의 수린섬이다. 수린섬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섬이지만 아직 국내 여행객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바다의 집시로 불리는 모켄족과 만났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수린섬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날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바다의 집시'로 불리는 모켄족의 모습.

'바다의 집시'로 불리는 모켄족의 모습. ⓒ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태국 수린섬' 편은 11.3%(AGB 닐슨 미디어 리서치, 수도권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이 토요일 오전 9시 40분인 점을 살피면 상당히 높은 시청률이다. 시청률이 말해주듯이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충성도 높은 시청자들을 많이 보유한 프로그램이다. 지난 2009년 9월 폐지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시청자들의 요구로 4개월 만에 프로그램이 재편성된 적도 있을 정도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제작진은 애청자들의 열렬한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시청자 여행 특집'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 특집에서 응모에 당첨된 4팀의 시청자들은 PD와 함께 여행하며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300회 가까이 프로그램을 유지해온 비결은 바로 시청자들의 관심이다.

여행자의 시각과 느림의 미학

우리의 일상이 점점 더 각박해질수록 여행 다큐멘터리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 한다. 게다가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이미 여행을 다녀온 이들에게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앞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들에게는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이 바로 <걸어서 세계속으로>다. 이처럼 다양한 시청자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전망은 앞으로도 밝은 편이다.

하지만 제작진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시청자들이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좋아하는 것은 '여행자의 시각'과 '느림의 미학'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맛집과 유명한 유적지만 찾아다니는 평범한 여행 다큐멘터리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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