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기획 아이템을 내라고 성화다. 하지만 전 언론사에 있을 때 이미 기획기사 수백 개를 썼었다. 더 이상 이리저리 묶을 것도 없다. 더 이상 식상한 아이템으로 기획기사 쓰고 싶지 않다. 그런데 국장님이 내놓으란다. 와, '죽것다'. 다시 머리를 쥐어 짜낸 결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예 내가 영화를 만들어보자. 내가 영화를 만들며 느낀 것을 써 보자.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하정우 오빠가 주위에서 어떻게 말을 하든지 무조건 "고!"를 하라고 조언을 해 준 이후에, 나는 딱 한 명의 충무로 전문가를 더 만나고 시나리오를 결정하리라 결심했다.

바로 올해 상반기 4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댄싱퀸>의 이석훈 감독님이다. 이석훈 감독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잘 지내세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아∼ 네...다음 주에 차 한 잔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영화 <댄싱퀸> 개봉 즈음 인터뷰를 했을 때, 그 분의 선한 인상은 강력한 잔상을 남겼었다. 좋은 성품을 지닌 감독님이라는 충무로 관계자들의 제보도 있었다. 또 딱 봐도 좋은, 나의 오락가락 갈팡질팡 성격을 침착하게 받아주실 것 같은 그런 기운을 느꼈다. 여자의 직감, 기자의 직감이 있지 않은가. (또 산으로 간다...)

나의 아지트 가로수길, 감독님은 초입에 있는 한 커피전문점에서 보자고 하셨다. <댄싱퀸>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 근황에 대해 묻고, 차기작에 대해 묻고, 그렇게 감독과 기자가 나눌 수 있는 이러저러한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12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댄싱퀸>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엄정화가 90년대 신촌지역 나이트클럽 문화에 대한 질문에 자신은 이태원을 주로 찾았다며 익살스럽게 대답하자 배우 황정민(왼쪽)과 이석훈 감독이 웃고 있다.

작년 12월 열린 영화 <댄싱퀸>제작발표회 ⓒ 이정민


"<인터뷰>와 <보슬아치> 무엇을 할까"

"감독님, 저 단편영화 찍는데 시나리오 좀 봐주세요!"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내가 이 분과 얼마나 친하다고 이런 말을...후덜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저 사람은 400만명에 이르는 영화를 흥행시킨 감독이 아닌가', '내 시나리오를 보면 단박에 내 실력이 다 들통 날 텐데...너무 창피하다'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만나자고 하지 않았는가. 가방에서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하고 있었던 두 편의 시나리오를 일단 주춤거리며 꺼냈다. <인터뷰>와 <보슬아치>. 아, 아직 '보슬아치'에 대한 단어를 모르신다면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면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여자가 마치 벼슬인 줄 아는 건방진 여성을 뜻하기도 하고, 여성임을 이용해서 남자들을 이용해먹는 여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절하고, 나의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좀 무거워졌다. '연예계판 도가니'라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뉘앙스다. 짧게 이야기하겠다. 휴...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군...난 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약하다. 성격이다...휴...말해야하는데...말하기는 쉬운데 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이돌, 그리고 그의 코디, 아이돌의 매니저, 그리고 그 아이돌을 취재하는 여기자. 이 4명의 추함이  적나라하게 다 보이는 시나리오다. 그게 바로 나의 단편영화 시나리오 <보슬아치>다. 더 이상 구체적인 장면을 묘사하지는 않겠다.

<보슬아치>와 함께 검토 대상인, <인터뷰>는 가식적인 여기자와 거만한 톱스타가 가식을 벗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복싱'하는 인터뷰다.

고민이 많았던 <인터뷰>와 <보슬아치> 시나리오 <보슬아치>는 좀더 영화적인 구성이 <인터뷰>보다 낫다고 해주셨다. <보슬아치> 자체가 100%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해주시지는 않았다.

▲ 고민이 많았던 <인터뷰>와 <보슬아치> 시나리오 <보슬아치>는 좀더 영화적인 구성이 <인터뷰>보다 낫다고 해주셨다. <보슬아치> 자체가 100%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해주시지는 않았다. ⓒ 조경이


이석훈 감독님 "<보슬아치>의 영화적 구성이 <인터뷰>보다 낫다"

설명이 길었다. <댄싱퀸> 이석훈 감독님은 <보슬아치>의 손을 들어주셨다. 확정적으로 말하고 아프게 말하는 성격이 아닌, 조곤조곤, 차분차분하게 우회적으로 상처 안 주시는 방향에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난 '다이렉트'로 다 알아들었다.

처음 단편을 만들면서 <인터뷰>는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코미디 부분이 강하지만, 이 부분도 화면에서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보슬아치>는 영화적 구성에서 <인터뷰>보다 낫다고 해주셨다. 물론 100%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해주시지는 않았다.

다만, 연예계 종사자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고 매니저, 배우, 기자 각각을 모두 비판하면서 기자가 기자 스스로를 비판하는 면도 재미있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컷은 이후 장면과 연결고리가 약하니까 빼라고 하셨고, 장면마다 좀더 영화적인 느낌과 긴장감을 살릴 수 있는 요소들을 알려 주셨다. 가르침이 디테일해서 좋았다. "감사합니다!" 

역시 내가 원하던, 나랑 맞는 그런 멘토인 감독님이었다. 사실 난 상처받기를 잘 하는 B형이다. 누가 나한테 '너 이것도 못하냐?!'하면 사실 진짜 못하면서도 상처를 심하게 받고, 마음이 너덜너덜 해지고 더 긴장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스타일이다. 내 절친들은 다 안다. 그래도 쿨하게 겉으로는 웃는다. 하지만 집에 가서 베개 부여잡고 눈물 통곡을 한다. 지인들은 너무 오래 봐서 다들 질려 한다.

이석훈 감독님은 내 성격을 꿰뚫어 보신 냥, 조곤조곤 상처 내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할 말씀은 다 하셨다. 역시 고수다. 난 이 감독님이 애써 돌려 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도 감독님 말씀을 다 내 머릿속에 새겼다. 

 영화<댄싱퀸>을 제작한 이석훈 감독이 7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만나 영화 제작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준 뒤 포즈를 취하며 웃고 있다.

지난 2월초 <오마이스타> 인터뷰 당시 이석훈 감독 ⓒ 이정민


하정우 오빠와 이석훈 감독님의 '이구동성'은?

또 나의 첫 번째 멘토 하정우 오빠랑 똑같은 말을 해서 놀라웠다. "첫 도전인 만큼 머릿속에 상상하는, 내가 기대하는 그런 장면들은 실제로 찍어 보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즉, 첫 작품에 기대를 하지 말라는 요지다. 마음을 더 내려둬야 한다...

어쨌든 선택의 고민은 끝났다. <보슬아치>를 찍기로. 헌데 감독님이 이 제목의 뜻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시나리오가 딱 그 이야기를 담은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제목을 너무 과하게 뽑은 것 같다. 하지만 제목은 나중에 수정할 수 있다. 영화 제목, 카피, 각색은 후배 이 모 기자의 몫이니, 맡기면 되지. 영화는 어차피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지 않는가(이거 하나만 정확히 알고 있다 ㅠㅠ).

<보슬아치>로 고고씽이다~~! 

P.S. 다음 편을 예고해 드리겠다.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O.S.T와 콘티에 대한 부분이다. 기대하시라 두둥∼

하정우 이석훈 댄싱퀸 보슬아치 단편영화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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