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엄지네> 속 한 장면

속 한 장면 ⓒ KBS


전쟁은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대부분 이성보다 본능에 의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숭고한 이타심을 발휘하고, 또 어떤 이는 평상시라면 상상도 못할 악행을 저지르고도 상황 탓을 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8일 방송된 KBS 2TV <2011 TV문학관-엄지네>(이하 <엄지네>)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가 이덕재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것으로, 전쟁이 인간의 평범한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때묻지 않은 갯벌, 절경을 자랑하는 바닷가 등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담은 영상미는 한국전쟁이 민초들에게 남긴 상흔과 대비되어 전쟁의 허무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한국전쟁 중 서울에 살던 엄지네(최지나 분)는 아들 석호(이민호 분)를 데리고 한 어촌 마을로 피난을 온다. 그들이 오던 날, 마을에는 굿이 벌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한 남자의 손가락을 작두로 잘라 '신'에게 바친다. '형을 잡아먹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구박을 받는 천덕꾸러기 현우(정승원 분)는 박수무당 한필(정원중 분)의 아들로 서울내기 석호와 티격태격하면서 친구가 된다. 고운 얼굴과 따뜻한 성품을 가진 엄지네를 동경하게 된 현우는 그런 그녀를 증오하는 석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김진사 댁 정혜(하시은 분)를 상습적으로 겁탈한 일 때문에 엄지네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아버지를 혐오하게 되지만, 서울로 같이 도망가자는 석호의 제안을 받아들일 용기는 없다. 급기야 정혜가 시체로 발견되고 발생하고, 아버지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된 현우는 다시 그 화가 엄지네에게 미칠까봐 전전긍긍한다.

비이성적 폭력에 앞장서는 한필, 사실은 약자 괴롭히기

<엄지네>에서 한필의 작두는 전쟁이 낳은 불의, 즉 비이성적인 폭력을 형상화하는 장치다. 주인공 현우는 작두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의 앞에서 번번이 굴복하고, 국방군도 인민군도 믿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작두를 공권력의 대체물로 삼아 각종 마을 송사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드라마 초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사람을 택해 그의 손가락을 잘라 제단에 바치는 제의를 벌인다. 손가락을 잘린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속한 마을 공동체의 결정을 따른 것인데, 그의 불행은 곧 나머지 마을 사람들에게 '실체 없는' 안도감이 되어 돌아온다. 드라마는 이 사건을 통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마을 공동체가 의지할 데라고는 결국 '신'에게 기도하는 일 말고 아무 것도 없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바로 그 제의를 주관한 이가 현우 아버지, 한필이다. 그는 박수무당이지만 사실 협잡을 일삼는 사기꾼이며,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정혜를 수 차례 겁탈하는 등 온갖 패악을 부리면서도 죄의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모든 원인을 '전쟁통'에 생긴 일로 치부해버리며, '전쟁통'인 만큼 자신은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논리로 약자들을 겁박하고 괴롭힌다.

느물거리는 중견배우 정원중 vs 존재감 넘치는 아역 정승원

ⓒ KBS


전쟁과 무법천지 상황이 가져다준 '권력'을 은근히 즐기는 한필은 드라마에서 전쟁의 광기를 직접 체현한다. 중견배우 정원중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그를 느물거리고 징그러운 인물로 형상화했다.

천덕꾸러기 현우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엄지네 역의 최지나는 사실 연기 경력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강한 이미지 탓인지 똑 부러지는 현대 직업 여성이나 도도한 술집 마담 등 제한된 역할을 맡아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시대극에서 심지 굳고 강인한 고전적인 어머니상을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현우 역의 아역 배우 정승원은 베테랑 연기자 틈바구니에서 기죽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친근한 얼굴과 때묻지 않은 표정 연기로 악행을 일삼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애증을 잘 표출했다.

특히 극 중반 호기롭게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위협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현우가 아버지에게 굴복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말간 콧물이 흘러내릴 듯 말 듯 정승원의 콧속을 두세 번 드나드는 처절한 장면은 극적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수 있을까

<엄지네>는 현우가 작두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비이성적 폭력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불의를 폭로하고 정면으로 맞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현우는 아버지의 불의에 저항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아들의 죄를 대신 떠안는 엄지네의 결연한 행동에 감화를 받아 비로소 두려움을 넘게 된다.

결과적으로 드라마가 강조하는 것은 '롤 모델'이다. 또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자처하는 두려움 없는 용기 하나가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용기를 깨우고, 다시 그 용기가 다른 용기를 깨우는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마침내 불의에 맞서는 용기가 들불처럼 번지게 되리라는 전언이다. <엄지네>는 이 시대 불의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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