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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유이치로'라는 일본인 격투기 선수가 있다. 이종격투기 대회 K-1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화끈한 펀치력과 저돌적인 경기 스타일을 보여주는 선수다. 하지만 그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은 다른 선수들과 다른 그의 독특한 입장신이다.

그는 링에 오르기 전에 만화캐릭터를 재현한 모습으로 등장해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는 인류 최강의 코스튬 플레이어(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의상을 입고 노는 행동을 즐기는 사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에도 코스튬 플레이어 격투가가 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스물다섯 살 청년 윤상원씨다. 윤씨는 나가시마 유이치로 못지 않은 코스튬 플레이와 열정 넘치는 경기 스타일로 아마추어 격투기 무대에서는 이미 스타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링네임 'PK야도란'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꿈 많던 20대 청년은 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

한국 유일의 코스튬 플레이 격투가 윤상원씨
 한국 유일의 코스튬 플레이 격투가 윤상원씨
ⓒ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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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매섭던 지난달 29일 저녁, 12월로 예정된 대회에 출전하고자 막 훈련을 시작했다는 그를 만났다.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윤씨의 첫인상은 여느 20대 청년과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의 기행(?)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는 나가시마 유이치로를 흉내 내는 걸까? 대답에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그는 한 때 히키코모리(집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사람)였다.

"작년에는 정말 1년 내내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바깥에 나간 날을 손에 꼽을 정도였죠. 전역 후에 느낀 상실감 때문이었죠. 준비했던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거든요. 학교도 이미 자퇴해버렸지 정말 앞길이 막막했죠. 혼란스러웠고 그냥 혼자 있고 싶었어요."

윤씨는 지난 2009년 군대에서 전역함과 동시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전공이었던 애니메이션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실무자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입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구조 때문이었다. 이 점을 미리 깨달은 윤씨는 군복무를 하며 틈틈이 사회로 나갈 준비를 했다. 자격증도 11개나 땄다. 고등학생 시절 서울기능경기대회 웹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한 실적도 있었다. 비록 대학졸업장은 없었지만, 자신의 땀을 인정받을 줄 알았다. 노력과 경험이 중요한 세상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긴 가방끈'만을 원했다. 그 앞에서 윤씨는 그저 '오타쿠'일 뿐이었다.

"자격증이나 상장들이 그저 종이쪼가리나 다름없었어요. 일 할 사람 없다는 중소기업도 고졸이라고 받아주질 않았어요. (한숨을 쉬며) 내가 뭐 했나 싶더라고요."

한 번, 두 번이 여러 번으로. 계속된 좌절에 윤씨는 결국 2010년의 시작과 함께 히키코모리가 됐다. 그리고 '악플러'로 변신했다.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모든 것이 삐딱하게만 보였다. '김연아에게도 악플을 다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나가시마 유이치로의 경기를 접했다. 우스꽝스런 차림의 그를 보며 처음에는 윤씨도 비웃었다고.

"딱 보면 웃기잖아요. 제정신 같지 않아 보이고(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가시마 유이치로 선수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선수의 성장과정, 훈련한 모습 같은 것들을 찾아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됐어요. 나가시마 선수도 사춘기 때는 히키코모리였거든요. 그래서인지 '나도 나가시마 선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오타쿠란 걸 드러내지 않았다면 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윤상원씨는 "좋아하는 분야에 주저 없이 도전하라"며 히키코모리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윤상원씨는 "좋아하는 분야에 주저 없이 도전하라"며 히키코모리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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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열망이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을 뛰어넘은 올해 봄, 윤씨는 마침내 격투기 도장에 입문했다. 이마에 맺혀가는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어두웠던 마음도 밝아졌고, 자연스레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나가시마 유이치로처럼 코스튬 플레이 입장신을 보여주며 시합에도 출전했다.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당연히 악플이 엄청나게 달릴 거라 생각했어요. 평범하지 않은 행동도 보여줬고, 그날 경기도 엉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고 해주고, 더 좋은 경기 보여 달라고 응원도 보내주더라고요. 정말 가슴이 뜨거웠어요."

시합에 출전하며 맺은 인연 덕분에 윤씨는 최근 새로운 일도 시작했다. 큰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히키코모리였다면 어디서도 얻기 힘든 일이다.

"예전처럼 집에만 있었더라면 현재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코스튬 플레이 등장신을 보여주지도 않고, 오타쿠라는 걸 드러내지 않았다면 과연 그 일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웃음)?"

12월에 열릴 예정인 격투기 대회 참가하고자 맹훈련 중인 윤상원씨
 12월에 열릴 예정인 격투기 대회 참가하고자 맹훈련 중인 윤상원씨
ⓒ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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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윤씨의 표정은 밝고 당차보였다. 암울했던 과거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스쳤다. 윤씨가 히키코모리에서 '꿈 많은 이십대 청년'으로 탈바꿈한데 반해, 우리 사회는 그를 내쳤던 2009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불안하지 않느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윤씨는 현답(賢答)을 들려주었다.

"물론 남들은 저를 이상하게 볼 거예요. 고졸에 직업도 확실하지 않으면서 운동이나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누구보다 제 삶에 만족해요. 불안하지도 않고요. 느긋하게 일도 하고 격투기도 계속 배우면서 미래를 준비할 거예요. 물론 등장할 때 코스튬 플레이도 쭈욱 할 거고요(웃음)."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인터뷰 장소였던 격투기 도장에 하나 둘씩 수련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윤씨도 도복을 고쳐 입고 수련 준비에 들어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시 한 번 현답이 돌아왔다.

"히키코모리에게 전해주고픈 말이라. 글쎄요, 저는 무조건 집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주저 없이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저절로 빛이 보이거든요."


태그:#코스튬 플레이, #격투기, #PK야도란, #오타쿠, #히키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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