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두 번째 인도여행이었다. 이 기록은 70일 간의 인도여행 중 여행 초반, 지난 여름의 고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여름의 고아
▲ 고아 안주나 해변 여름의 고아
ⓒ 김다혜

관련사진보기


축축한 아침이다. 에메랄드 빛의 멋진 해변 풍경을 위해 100루피(약 2200원)나 더 주고 숙소를 구했다. 하지만 몬순 기후 때문에 바다는 황토색이었다. 결국, 100루피는 내게 축축한 아침만을 제공해준 셈이다. 아무도 없는 비수기의 고아. 3대 히피 집결지 중 하나인 고아,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고아가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고요하다 못해 침울하기까지 한 아람볼 해변은 막막했지만, 나는 축축함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걷기로 했다. 녹지 곳곳에 인도풍의 원색적인 건물이 꽂혀 있었다. 고요한 시공간 속에서 혼자있다는 것이 때때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광활한 자연이 내뿜는 웅장함과 대기의 냄새, 소리 덕분에 음악마저 생각나지 않던 순간이었다.

자연이 주는 풍만한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방학 때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던 친구는 함께 공부하는 스터디그룹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친구는 이들과 나눈 대화를 내게 들려주며 "과연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었다.

스무 살 때에는 세상이고 뭐고 젊음의 환상들만 마냥 좇았다. 대학교 2학년 때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세상은 내가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꿈꾸는 대로 변할 것이라고, 서로간의 소통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런데 3학년이 돼 교지편집위원회의 편집장이 되고 보니, 들끓던 열정이 점차 식었다. '내가 이곳에서 아무리 외치고 고민해도,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겠지'라는 회의감이 밀려들어왔다. 

모든 학교의 교지는 매년 비슷한 목소리를 외쳤고, 몇 년째 계속된 외침에도 세상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통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들이 버겁게만 느껴졌고, 버거움 뒤에 밀려오는 회의감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왜 사느냐'는 물음이 한 학기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것 같았다. 사실 이런 회의감과 질문은 어쩌면 내게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존재를 온몸으로 표현해줬던 애인이 내 곁에 없었고, 물음이 없어도 괜찮은 대학에서는 학점을 위한 달리기만 존재했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라는 물음이 나를 지금 고아에 닿게 한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돈이 떨어질 때 까지 비수기의 고아를 여행하는 히피

여름, 비수기 고아의 풍경
▲ 인도 소 여름, 비수기 고아의 풍경
ⓒ 김다혜

관련사진보기


광활한 자연 앞에서 멋진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럴듯한 표현도,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도 건지지 못한 채 터덜터덜 숙소 쪽을 향하는데, 누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서양 여성 한 명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커플도 아니고, 인도인도 아닌, 여행자. 그것도 여성이라니! '옳다구나' 싶어 그녀에게 다가가 친한 척 말을 건넸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그녀의 주변에는 인도인 남자 두 명이 함께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털털해 보이는 그녀는 나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받아줬다. 그녀는 "안주나 해변을 갈 예정인데, 오토바이에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안주나 해변은 내 숙소가 있는 아람볼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혼자서 걷고, 책 읽고, 음악 듣는 일이 그날 계획의 전부였던지라 흥미로운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여행자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은 비수기의 고아에서, 그녀는 텅 빈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아침에 걸었던 길들을 지나고나니 또 다른 풍경들이 나를 맞이했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무들이 내 위에서 극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스쳐가는 바람, 공기, 햇볕 모두 나의 자유로움을 축하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 소리 지르고 팔 벌려 바람을 안으며 마치 고아를 정복하려는 기세로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비수기의 안주나 해변도 고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상점들이 비를 쫄딱 맞고 잔뜩 움츠려 있었다. 문을 연 가게를 찾다가 발견한 바(Bar)는 해변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 아무리 비수기라도 해변에는 음악이 꼭 있어야 한다는 듯 모던록 풍의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 소리를 따라 바 안으로 들어가 보니, 빈티지한 가게 분위기 속에서 인도 관광객 두 팀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감자 칩과 맥주를 주문했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냥 하기 싫을 뿐이야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하니, 처음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두 인도 남자가 눈에 밟혔다. 건들건들한 태도가 '나는 여기 젊은 허세남'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듯.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 스위스 여성과 두 인도 남성의 관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스위스 여성은 끊임없이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태웠다. 옆에서 두 인도 남성이 뭔가를 말아서 스위스 여성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담배 피우듯 폈는데, 모양새가 아무래도 대마 같은 마약 종류인 듯했다.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할 계획이라는 이 40대 스위스 여성은 전형적인 히피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인도 남성들의 저렴한 농담과 거침없는 스킨십을 흔쾌히 응하며 항상 그들의 몫까지 함께 계산했다. 두 인도 남성은 내게도 끊임없이 장난을 치며 대마 같은 물건을 권했다. 그들의 가벼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람볼로 혼자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술을 못 마실 사람처럼 주야장천 맥주를 마셔대던 스위스 여성은 언제나 반쯤 취해있길 바라는 듯했다. 어쩌면 술에서 깨어나길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인도 남성의 노골적인 태도를 유쾌하게 받아주는 그녀가 신기해 보였다. 근데 두 인도 남성은 되레 도도하게 구는 내가 신기했나 보다. 내가 그들의 놀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자, 인도 남자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행복해하지 않지? 그녀처럼 행복해져 봐. 고민은 잊고 그냥 행복해져 봐."

난 질문을 듣자마자 이렇게 답했다. 나의 행동은 그들의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스러운 행동인가 보다.

"행복이라고? 그건 너의 행복이지. 나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냥 하기 싫을 뿐이야."

사랑, 자유, 소녀... 단지 그 세 가지 뿐?

인도 남성들은 허세란 허세는 모두 자신의 몸에 걸쳐놓은 듯 행동했다. 그 중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자유(Freedom)에 대한 모독이었다. 한 인도 남성은 "Love, Freedom, Girl. Just three things"라고. 자유라니, 그것도 저 인도 남자의 입에서 말이다!

자유.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은 상당하다. 그래서 이 말은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의미로, 특히나 허세를 치장할 때 가장 많이 쓰인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자유를 말할 때에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필요한 조건은 '존중'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너네는 개를 먹는다지? 그럼 고양이도 먹나?" 같은 농담을 던질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문화 등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개인의 욕구로 자유를 설명하는 공리주의는 이 인도 남성의 자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파우스트도 자신의 욕망, 쾌락의 자유를 좇아 열정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떠한가? 결코 그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같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자기 스스로 행위의 규칙을 만들되, 그것이 단순한 욕망이 아닌 '모든 이성적 존재에 보편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 남자가 추구하는 그 자유는 자유가 될 수 없다. 그의 자유는 내게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건으로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옳은 행위나 가치가 무엇인지 성찰한 뒤 자유를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찰 없는 행동, 성찰 없는 자유는 단지 쾌락을 위할 뿐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이 가치가 없듯이, 성찰하지 않는 자유 또한 가치가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유의 조건 또한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루소는 스스로에게 법을 주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자유로 봤고, 루소의 영향을 받은 칸트 또한 자유로운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이성적 존재에 보편적인 규칙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율적 인간을 추구했다. 자유의 조건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주체를 위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되지 않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개개인의 욕구 충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욕망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욕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쾌락이나 욕망에 의한 자유 추구는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자유'라는 멋진 단어를 쾌락만을 위한 것으로 남용해서는 안된다. 자유는 쾌락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단지 한가로운 오후에 외국인의 돈을 뜯어 맥주를 마시고 마약이나 하면서 '나는 자유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충분한 성찰 뒤의 자유, 자유, 자유

아람볼 해변으로 다시 돌아가는 때는 한 인도 남성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돌아와야 했다. 스위스 여성이 너무 취했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길인데, 내 얼굴에 흩뿌려지는 먼지와 바람들이 내 뺨을 찰싹 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긴 왜 간 거야! 너 왜 거기 따라갔어!'라고 꾸짖듯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는 친구의 문자가 오늘의 화두처럼 느껴진다.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행해졌던 7080 세대의 투쟁들은 투쟁 이전에 충분한 성찰이 이뤄지지 않은 채 또 다른 권력의 지배를 불러들이고 말았다는 비판이 있다.

진정한 자유를 외치는 일. 진정한 자유를 같이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선행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태그:#인도, #고아, #자유, #여행, #안주나 해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