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젠트FC 선수들.

리젠트FC 선수들. ⓒ 박성우


지난 9월 6일 저녁 8시 런던 북부 이슬링턴에 위치한 마켓로드 피치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산하 이슬링턴 미드위크 리그(Islington Midweek Football League)의 2011/2012 시즌 첫 라운드 경기에서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집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이슬링턴 리그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디비전2에서 바로 전 시즌에 고작 승점 2점(2무 16패)에 골 득실차 -55(득점 21, 실점 76)를 기록하며 최하위를 차지하고 이번 시즌 역시 최약체로 평가받던 팀이 상대팀을 접전 끝에 3-2로 물리치고, 리그 참가 후 감격적인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패배한 이슬링턴 S.S(Shooting Stars)는 상부 리그인 디비전1에서 앞 시즌에 승점 8점(2승 2무 12패)을 얻고 강등됐지만, 실력에서는 상대팀보다 한 수 위라 평가되던 상황이었다.

머나먼 영국에서 축구에 대한 또 다른 꿈을 꾸는 한국 젊은이들

이 경기에서 리그 최약체 클럽은 전반 초반에 경기를 비교적 잘 풀어가다, 역습을 당하며 수비가 불안해지고 결국 기습 선제골을 허용했다. 이전에 치른 경기들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날만은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실점 후 곧바로 동점골을 터트리고 후반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후반 중분 무렵 최약체 클럽의 돌파력이 좋은 미드필더가 하프라인 왼쪽부터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멋지게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곧이어 허무하게 동점골을 내줬다. 그러면서, 그날마저도, 그토록 바랐던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잘해야 무승부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상황은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바뀌었다. 경기 종료 직전 1975년생인 이 클럽의 최고참 선수가 끝내 결승골을 넣었고, 클럽은 극적인 리그 첫 승을 올렸다.

이날 골을 넣은 선수는 남정태, 송종민, 그리고 정훈이었다. 그리고 이 클럽은 잉글랜드 축구협회에 등록된 팀 중 가장 약하고 가난한 곳 가운데 하나인 리젠트FC다. 북런던에 자리 잡은 리젠트FC라는 팀 이름은 물론 선수 이름, 리그 명칭까지 모두 낯선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리그는 잉글랜드 축구협회 소속으로 운영되는 수많은 공식 리그들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박지성·이청용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최고 수준의 프리미어리그보다 약 19단계 정도 낮은, 다시 말해 거의 20부에 해당하는 영국 축구 최하부 리그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팀에 영국인 선수도 몇몇 있지만 주전은 대부분 한국 선수들이다. 한국 청년들이 축구의 본고장 영국 땅에서 스스로 주도적으로 만든 열정적인 축구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에서 오직 축구만을 삶의 모든 것으로 여겨 젊음과 인생을 전부 걸고 축구 선수로 살아오다, 엘리트 축구만 각광받는 우리 축구 문화의 넘기 힘든 장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한 후 영국으로 건너온 청년들이 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영어 한마디 못하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축구에 대한 또 다른 꿈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한국을 떠나 머나먼 이곳으로 온 청년들이다. 더불어, 축구를 사랑하는 현지 유학생과 교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리젠트FC의 즐기고 도전하는 클럽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산하 이슬링턴 미드위크 리그 경기 모습.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산하 이슬링턴 미드위크 리그 경기 모습. ⓒ 박성우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워"

이 팀의 주전 미드필더인 정정용(28) 선수를 만나보았다.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절친한 동료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정 선수는 K리그에서 뛴 적은 없지만 2년 전까지 내셔널리그(실업 축구) 수원시청(현 수원FC)의 주전 미드필더였다. 특히 2008년 수원시청이 리그 최다 연승 기록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팀을 이끈 주축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 영국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2010년 초에 수원시청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축구밖에 할 줄 모르고 아는 게 축구밖에 없어서,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어서 무작정 왔어요. 맨땅에 헤딩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처음엔 7부 리그 팀까지 찾아가 테스트도 받아보고 훈련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기량은 둘째치고, 일단 영어가 전혀 안 되었어요. 절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요. 학창 시절에 축구부에 있느라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게 참 아쉬웠습니다. 언어 문제가 심각하니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 힘들었죠. 얼마 못 가서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정 선수는 프로 축구 선수의 꿈은 접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만의 새 희망을 품고 있고 오히려 지금은 그것이 더 단단해 보여 좋았다.

- 현재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주는 정식 코치 자격증이 다섯 종류나 되는데 그걸 최대한 많이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많이 보고 배워서 한국에 돌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정 선수도 아쉬워하듯이 한국의 운동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초등학교 때부터 오직 최고, 즉 제2의 박지성이라는 목표 아래 앞만 보고 무한 질주하도록 강요를 당하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든 쉽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즉 학생 선수들이 다시 학교와 사회로 원활히 돌아갈 수 있게 해줄 보완 장치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 여기서 느낀, 한국 축구 문화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 치우치기보다는 즐기면서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주말 리그제 도입과 유소년 축구 활성화 정책 등 축구 문화를 바꾸기 위한 몇 가지 시도가 이뤄졌다. 그러나 정 선수의 예상처럼,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엘리트 축구 선수로 잘 성장하기 위해 각종 '스펙' 쌓기와 엄청난 훈련에 매몰되는 우리 환경에서 그마저 제대로 자리 잡기 쉽지 않아 보인다. 참고로 영국에선 15세 전후가 되어야만 클럽 유스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엄격한 원칙을 정해 놓고 있다.

리젠트FC의 또 다른 주전 미드필더인 영국인 태(Tae)는 현재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 학생이다. 태 또한 어릴 적부터 즐기던 축구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프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15세 되던 때 런던 서부의 유명 클럽인 퀸즈파크 레인저스(QPR)의 유스팀과 리저브팀에 들어가 생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태는 프리미어리거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태는 다른 영국 대학생처럼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하며 내년엔 좋아하는 한국으로 유학까지 갈 것이라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런 태에게서 실패의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청년의 패기와 건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정정용(왼쪽) 선수와 태(오른쪽) 선수.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정정용(왼쪽) 선수와 태(오른쪽) 선수. ⓒ 박성우


최하부 리그, 바닥에 가까운 성적... 그러나 열정만큼은 최고

리젠트FC가 새 시즌을 시작한 지 어느덧 몇 주가 흘렀다. 매주 한 경기씩 치르는 리그 기본 일정에 더해 리그컵 경기까지 치러야 하는 빡빡한 일정은 상부 리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빡빡한 일정 속에서 리그의 경기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토너먼트로 열리는 리그컵 시합이 있던 10월 6일, 기자는 다시 한 번 경기장을 찾았다. 리젠트FC는 유달리 매서운 추위 속에 열린 그날 경기마저 4-1로 내주면서 리그컵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열정만큼은 지근거리에 있는 프리미어리그 빅클럽 아스널의 최신식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잔디 위 선수들의 그것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클럽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제이미 페린(29)씨에게 이 팀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영국 축구 클럽들은 다들 이렇게 시작했고 성장합니다. 대부분 같은 공장 노동자들, 같은 계급·인종·민족·지역·종교를 가진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는 같은 조상을 모시는 가족 팀으로 출발합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셀틱 등도 200년 전엔 그렇게 시작했죠. 오늘 우리가 맞붙은 상대인 유니티(Unity)는 한 가족이 배경이 된 팀이고요.

2005년에 창단한 리젠트FC는 한국, 한국인이 그 배경입니다. 그동안 우리 팀이 영국 내 한인 사회의 각종 아마추어 대회들에서 많이 우승하다보니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입단하고, 비록 작은 규모지만 스폰서도 붙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의 일환으로 FA 최하부 리그에 참가하게 된 겁니다."

 경기장에서 만난 클럽 운영진, 제이미 페린.

경기장에서 만난 클럽 운영진, 제이미 페린. ⓒ 박성우


주로 재벌기업이 그룹 홍보와 세금 혜택 등을 위해 국가와 공모하여 프로 스포츠 구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한국 현실과 많이 달라서 우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리젠트FC는 작년에 리그 최하위를 기록한 덕분에(?), 그리 많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유니폼에 광고를 싣던 스폰서 지원이 올해엔 아예 끊긴 상태라고 한다.

리젠트FC는 현재 1승 2패(승점 3, 득점 5, 실점 10)로 리그에서 탈꼴찌에 성공한 상태다. 꿈과 열정으로 가득 찬 리젠트FC가 건투하기를, 그리고 먼 미래엔 같은 지역 팀인 아스널, 토트넘에 버금가는 명문 클럽으로 영국 축구계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리그컵 경기에서 패배한 리젠트FC.

리그컵 경기에서 패배한 리젠트FC.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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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거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방송, 미디어, 대중문화 연구하며 (BBC, K-Pop, 문화 정치, 스포츠)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에서 박사 논문 준비 중/ <오마이뉴스>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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