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쾌한 청년이 있다. 아마추어 합창단 단원인 그는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대구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뛴다. 공연을 앞둔 흥분만은 아니다. 중학교 시절 첫사랑의 상대를 그 공연에 초대했던 것이다. 그 어떤 공연에서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청년.

18년 전에 차마 하지 못했던 고백을 이제야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전한다. 청년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이고, 합창단 단원들도 모두 그와 같은 남자들이다. 그래서 그의 춤과 노래는 사랑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고백이기도 하다. 공연이 끝나면 청년의 첫사랑은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창 너머로 내려다보는 청년의 쓸쓸한 실루엣.

 G-보이스 합창단에서 공연 중인 시골 게이 영수

G-보이스 합창단에서 공연 중인 시골 게이 영수ⓒ 시네마달


이처럼 인상적인 시퀀스를 품고 있는 <종로의 기적>은 하는 일도 성격도 다른 네 명의 게이가 각 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다. 그림자나 목소리로만 등장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을 향해 무심히 걸어오는 감독까지 합하면, 다섯 게이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네 개의 독립적인 꼭지를 합쳐놓은 것 이상의 덩어리로 다가온다. 각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정서의 굴곡이 장편영화가 가진 기승전결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성적인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냉대를 받는 공통의 현실이 네 사람을 옥죄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 굴레를 벗고 당당히 세상에 나서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드러내는 남자들 사이의 사랑이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점도 몰입에 큰 도움을 준다. 비록 화면 곳곳에 모자이크로 처리된 얼굴들이, 영화에서마저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을 수시로 상기시켜 주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공간도 큰 작용을 한다. 낙원상가를 에워싸고 있는 종로3가는 영화를 이끄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 거리는 동성애자, 혹은 성소수자라고도 불리는 게이들의 해방구이다.

그곳에는 가족에게도 말 못하는 비밀을 유일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이들에게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커뮤니티가 있다. 그 속에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영화도 찍고 파티도 벌이며, 시위도 하고 사랑도 만난다. 다양한 각도와 조명으로 보이는 지하철 종로3가역 포스트는 마치 어두운 밤바다에 비추는 항구의 불빛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종로3가역 포스트

종로3가역 포스트ⓒ 시네마달

에피소드1. 영화감독 게이

소준문은 영화감독이다. 게이들의 사랑에 관한 극영화를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있는 그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 게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게이인 사람은 감독 혼자뿐이다. 그는 촬영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탓을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촬영은 중단되고 만다.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군에 입대한 뒤 신병 상담에서 "남자와 연애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직후 군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1년이 넘도록 강제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상처가 망령처럼 준문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 삽입된 준문의 데뷔작 <올드랭사인>의 몇 장면들은 그 자체로 눈가를 뜨겁게 만든다.

에피소드2. 운동권 게이

청년 한의사회 사무차장으로 평택 쌍용차 공장 파업현장부터 베트남 현지까지 누비며 의료봉사를 하는 장병권은 씩씩한 청년이다. 퇴근한 뒤에는 파트너와 함께 동성애자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활동도 하고 숙식도 한다. 두 가지 일(실상은 사회운동)을 하는 그는 파트너에게 미안할 정도로 너무 바쁘다.

그래도 그는 씩 웃으며 말한다. "동성연애 하려고 동성 인권운동 하는 거야" 그의 꿈은 소박하다. 동성 애인을 직장으로 데려와 동료들에게 소개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게이인 자신이 궁색하고 사소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일터가 그의 꿈이다. 오늘도 그는 피켓과 전단을 들고 거리 곳곳을 씩씩하게 누빈다.

에피소드 3. 시골 게이

작은 스파게티 집을 운영하는 최영수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친구다. 귀여운 말투의 'x발'과 '이년 저년'을 수시로 날리는 영수는 스무 살 때 경북의 어느 시골에서 상경한 시골 게이다. 서두에 소개한 시퀀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0년 이상 혼자만의 아픔을 안고 살았던 그는 종로3가 어느 포장마차에서 게이 선배를 만나 '친구사이'라는 게이 커뮤니티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새 세상을 발견한 그는 'G보이스'라는 게이 합창단 활동에 푹 빠져 있다. 하지만 그토록 해맑은 청년이 누리는 공동체 속의 작은 행복은 머지않아 깊은 슬픔으로 이어진다.

에피소드 4. 직장인 게이

직장생활 6년차인 권욜은 일요일을 맞아 결혼식장을 찾는다. 신랑신부가 행진할 통로 끝을 가로막고 있는 줄에는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다. 카메라는 한동안 그 팻말을 바라본다. 욜과 함께 사는 애인은 조금 특별한 병을 앓고 있다.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다. 에이즈 감염인들을 돕는 모임에 나갔던 욜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물론 그가 감염인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딱 내 스타일이었어. 우리가 24시간 섹스만 하는 건 아니잖아?" 욜은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에이즈 감염인을 위한 활동에 발 벗고 나선다.

<종로의 기적>은 한국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의 실상과 애환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저 '애환'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절박한 상황들이긴 하지만, 영화는 이를 애써 강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전달하는 감성은 결코 밋밋하지 않으며,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끝까지 흡인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다큐멘터리가 게이들의 특수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시선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여러 해에 걸쳐 공과 품을 들인 흔적이 장면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직 시간만이 연출할 수 있는 빛나는 장면도 있다. 남루한 듯 세련된 화면과 곳곳에 배치된 영화적 장치, 인물들의 생생한 개성과 내면을 포착해낸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이런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사람에 관한 진한 이야기로 가슴을 두들기고 그 자리에 긴 울림을 남기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한다면, <종로의 기적>은 분명 좋은 영화이다. 드물게 보는 좋은 영화라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종로의 기적>은 좋은 '게이 영화'가 아니라 게이에 관한 '매우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무렵에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을 <종로의 기적>으로 정하게 된 가슴 저릿한 이유를 알게 된다.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배경으로 네 청년의 환한 얼굴들이 하나로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종로 거리에 해가 지면
이 거리는 또 다시 활기를 찾는다.
이곳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자신을 긍정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숨죽여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 순간은 바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적의 순간들이
평범한 일상이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리뷰는 6월10일 발간된 국제앰네스티 소식지인 <앰네스티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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