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2003년 3월 9일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한 날입니다. 젊은 평검사들과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공개토론은 TV로 생중계 되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이쯤가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며 얼굴을 붉혔으나, 국민들은 "검찰이 권력의 주구였단 말이냐"고 항변하는 검사들의 기개를 통 크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검사스럽다'였습니다. 기고만장한 검사들을 가리킨 것만은 아닙니다.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온 검찰을 개혁하기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하려는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이 끝내 좌절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검찰총장이 "국민의 지탄을 받는다면 내가 먼저 내 목을 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이후 '삼(성)검', '섹검', '스폰서 검사'로 조롱을 당하면서도 제 목을 치기는커녕, 수술을 단행하려는 야당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교하고 표리부동한 행동'을 풍자한 '검사스럽다'의 위세는 여전합니다. 최근 김준규 검찰총장이 난데없이 해병대 상륙작전을 들먹이며 중앙수사부 폐지반대를 천명하고 그와 동시에 청와대가 검찰의 손을 들어주고 나섰으니까요.

"증거에 따라 압수수색을 하러 왔을 뿐"

이런 한국 검찰과 권력에 대해 "증거에 따라 압수수색을 하러 왔을 뿐"이라는 검사가 있습니다. '법대로'라는 불변의 원칙에 따라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 <쥬바쿠>입니다.

영화는 1997년 노무라 증권이 주총에 야쿠자들을 총회꾼으로 동원한 '이익공여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일본 제일권업은행의 불법대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4조 5천억 원 가량을 불법대출하고 2조 4천억을 분식회계처리 하는 등 천문학적인 금액의 비리를 저질러 최악의 '권력형 게이트'로 지목된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영화는 제일저축은행에 이어 프라임저축은행까지 불법대출로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일본 금융시장을 빼다박은 한국 금융시장의 현 주소를 복기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집니다. 

영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절대 권력에 맞서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활약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도쿄지검 특수부를 '검찰의 꽃'으로 부릅니다. 1976년 다나카 전 총리 등 자민당 실세를 법정에 세운 록히드 사건, 1988년 다케시타 정권을 붕괴시킨 리쿠르트 사건, 1992년 자민당 30년 장기집권에 조종을 울린 사가와규빈 사건 등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핏줄까지 벗겨'내는 특수부의 비타협적인 법의 정신을 가감없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 검찰은 초라합니다. 지난 2010년 스폰서 검사 사건 후 김준규 검찰총장은 "(그래도) 검찰만큼 깨끗한 데를 어디서 찾겠느냐"며 검찰개혁을 위해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조사를 벌였으나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났습니다. 죽어가는 권력은 사정없이 물어뜯고, 중수부 폐지가 거론될 때마다 터지는 대형사건을 휘두르며 정치권에 시위하는 중수부가 과연 도쿄지검 특수부처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검찰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1981년 전두환 정권과 함께 출범한 중수부가 과연 오명의 역사를 씻어낼 수 있을까요?

외압에 맞선 도쿄지검 특수부 VS 외압에 굴복한 대검 중수부

 도쿄지검 특수부 오노기 검사가 ACB은행 불법 대출 사건과 관련해 본사 관계자에게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고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 오노기 검사가 ACB은행 불법 대출 사건과 관련해 본사 관계자에게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고 있다. ⓒ 도에이?튜브 엔터테인먼트


1997년 도쿄지검 특수부. 마루노 증권과 오다지마라는 거물 총회꾼(기업의 사주를 받아 주총에서 회의를 방해하고 그 대가로 거액의 불법대출을 받는 세력) 간의 불법거래를 포착하고, 아사히중앙은행(ACB은행)이 300억엔을 불법대출해 준 사실을 밝혀냅니다. 특수부 오노기 검사(엔도 케이치)는 "ABC은행을 건드리면 각오해야 한다"는 지검장의 경고에 "그들의 비리를 밝히지 않으면 거품경제 청산은 어렵다"며 수색영장을 들고 ABC은행 본점에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블룸버그의 여성앵커 미호에게 정보를 제공해 비공식 공조체계를 갖춥니다.

보수신문과 TV 대담프로에서 연일 특수부의 수사가 일본 경제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떠벌리는 가운데 특수부가 상대해야 할 인물은 ACB은행의 고문으로 일본 정재계에 절대 권력을 행사해 온 사사키(나카다이 타츠야). 영화는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두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총리도 전 총리도 전전총리도. ACB 은행장들과 차기 은행장들까지."

사사키는 정치권과 대장성에 로비를 하는 한편 경영진들에게 기자회견을 열어 은행장과 회장의 사퇴로 위기를 수습하도록 지시하는 등 다각적인 대응전략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특수부가 총무부장 등 실무진 3명을 구속한 데 이어 경영진을 향해 칼날을 세우면서 위기는 증폭됩니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합니다. 사사키의 사위 기타노(야쿠쇼 코지)를 중심으로 중간 간부 4명이 ACB은행의 개혁을 위해 경영진과 전면전을 벌일 것을 결의합니다. 이들은 해외파 나카야마를 신임행장으로 추대하면서 사사키를 포함한 최고경영진의 일괄사퇴를 촉구합니다. 그와 함께 자신들이 선임한 변호사들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불법대출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한편 미호와 협력하며 특수부와 연계합니다.

특수부가 경영진들을 하나둘씩 체포하는 사이 조사위원회는 드디어 사사키와 대면하는데, 영화의 이 장면은 삼성 이건희 회장을 연상시킵니다. 두 사람 모두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릅니다. 사사키는 제2인자 히사야마의 고언을 일언지하에 자른 후 최고 고문직에 오르고, 조사위원들조차 벌벌 떨게 만들며 위세를 과시합니다. 이 회장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부터 삼성비자금 사건까지 떡 주무르듯이 가볍게 요리한 뒤 경영 일선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일본 경제가 금융공황에 빠진다는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CB은행을 수사하듯이 대검 중수부가 삼성 일가를 수사했어도 이 회장과 식솔들이 지금처럼 건재할 수 있었을까요? 특수부가 ACB은행 경영진 구속에 이어 대장성 등 정치권으로 수사를 확대한 것처럼 중수부가 부산저축은행의 몸통으로 지목되는 권력 실세를 법대로 수사했다면 지금처럼 청와대와 짜고 치는 고스톱이 한국 검찰에 '쥐약'이 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재현될 수 있었을까요?

국가와 자본의 '쥬바쿠'에 맞서는 샐러리맨

 기타노가 히사야마의 유서를 특수부에 건넨 뒤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했던 사사키가 오노기 검사에 의해 도쿄지검 특수부로 압송되고 있다.

기타노가 히사야마의 유서를 특수부에 건넨 뒤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했던 사사키가 오노기 검사에 의해 도쿄지검 특수부로 압송되고 있다. ⓒ 도에이?튜브 엔터테인먼트


히사야마가 자살하면서 영화는 급물살을 탑니다. 그는 자신이 총애했던 기타노에게 ACB은행의 불법 대출을 비롯해 사사키의 정관계 로비 등 비리자료를 유서로 남깁니다. 하염없이 빗속을 내달린 기타노가 도착한 곳은 사사키의 별장. 히사야마의 자살 소식을 건네며 퇴진을 요구하지만 사사키는 "정계에서 복귀를 원한다. 자네와 함께라면 금상첨화"라며 와인을 들어 건배를 합니다. 이윽고 기타노는 유서를 흔들며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고 사사키는 유서를 빼앗기 위해 달려들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ACB은행 주주총회를 앞두고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조사위원들을 상대로 한 테러와 협박이 본격화됩니다. 경시청에 주총 보호를 요청한 조사위원회는 사사키를 정점으로 한 비리세력들과의 일전에 대비해 시뮬레이션을 가동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갑니다. 그리고 기타노는 특수부의 오노기 검사와 미호를 만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 영화는 특수부가 대장성에 선전포고를 한 후 해고된 공무원만 112명이었다고 밝힙니다. 기타노의 독백과 함께 영화는 1년 뒤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지금도 일본의 다른 은행들은 여전히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

영화에서 특수부 오노기 검사와 함께 눈에 띄는 인물은 ACB은행의 샐러리맨들입니다. 사사키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의 탐욕과 천민성에 대척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이들은 부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자, 알면서도 묵과한 자, 혼자만 살기 위해 용을 쓰는 자, 부패를 알고 개혁하려는 자 등 천태만상입니다. 그들 중 기획실 직원인 이시이가 야쿠자의 총에 쓰러진 뒤 "지금까지 명예를 맛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느꼈다"며 '쥬바쿠'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은 직장인들에게 진정한 조직의 발전과 개혁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게 합니다.

영화의 제목 <쥬바쿠>는 한자로 주박(呪縛) 즉, 주술을 걸어 속박한다는 뜻으로 ACB은행의 불법 대출과 비리에 자신도 모르게 헤어 나올 수 없게 연루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해 영화는 기타노와 이시이 등을 통해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다면 먼저 국가와 자본의 일방적 '쥬바쿠'에 맞서야 한다고. 그리하여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면 막을 수 없는 부정과 비리는 없다고.

국민의 검찰이 되기 위한 존재 조건은 무엇일까

 상해치사범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 하나오카 중의원이 쿠리오 검사 팀의 물증 끝에 알리바이가 깨지고 특수부는 그를 소환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다.

상해치사범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 하나오카 중의원이 쿠리오 검사 팀의 물증 끝에 알리바이가 깨지고 특수부는 그를 소환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다. ⓒ 도호영화사


지난 2007년 대검찰청은 '정의 추구'라는 주제에 공감해 일본 영화 <히어로> 시사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앞서 2005년에는 <공공의 적 2> 시사회도 했습니다. <히어로>는  일본 정계를 쥐락펴락하는 전 국토대신 하나오카 중의원이 뇌물수수 혐의를 숨기기 위해 상해치사 사건 용의자와 알리바이를 조작한 사실을 도쿄지검 검사 쿠리우(기무라 타쿠야)와 특수부가 공조해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렸습니다.

<히어로>에서 인상적인 인물은 변호사 가모입니다. 전직 검사인 가모는 왜 검사를 그만두었느냐는 쿠리우의 질문에 "검사는 자신의 모든 인격을 걸고 사건에 임해야 하지만 현실은 법률 기계처럼 일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웠고, 재판에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할 수 없어 그만뒀다"고 말합니다. 죄를 구원하지 않고 죄를 증명해야 하는 검사의 존재 조건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가모의 이 말은 많은 것을 함의합니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모토는 '검찰은 늘 배고파야 한다'로 집약됩니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창공에 떠 있는 독수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럴 때, 정치권력과 거대자본을 감시하고 부정과 비리를 엄벌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검찰의 배고픔과 눈이 권력의 뒤꽁무니만 쫓는다면 그것은 독수리가 아니라 까마귀에 불과합니다. 검찰이 공공의 적을 향해 발톱을 세워 국민들의 히어로로 거듭 날 것인지, 권력의 품에 뛰어들어 '검사스럽다'는 조롱과 수난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는 온전히 검찰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히어로>에서 쿠리우 검사는 말합니다. "하나오카를 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진실을 규명하다보니 하나오카를 잡을 수 있었다"고. 이 말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실패의 종합선물세트 격인 부산저축은행 게이트를 목전에 두고서도 중수부 폐지에 골몰하고 있는 한국 검찰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국민의 검사가 되기 위한 존재 조건은 무엇인가."

덧붙이는 글 영화 <쥬바쿠>는 2001년 3월 개봉작입니다.
쥬바쿠 중수부 도쿄지검 특수부 히어로 부산저축은행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