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쌍해. 전부 학생들이라 아주 이쁜데 다 불쌍하더라고… 부모님들도 못보고 그냥 학교에서들 전부 왔대. 엄마 아부지 보고 싶다고 얼마나 울고 그랬는지 몰라. 마음이 막… 가다가 다 죽었다고 하더라고. 우리 마을에는 해코지 한 게 없는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터뷰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합니다. 총 들고 쳐들어 온 그 '적'들이 소 끌고 쟁기질하더니 '동무'가 되고, "해코지 한 것 하나 없던" 동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회상하는 할머니를 통해 냉전과 대결의 역사가 낳은 비극을 고발하는 영화 <적과의 동침>(4월 27일 개봉)입니다.

적인 줄 알았는데 소 끌고 쟁기질까지 하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평택의 석정리. 구장어른(변희봉)의 손녀딸 설희(정려원)의 혼사 준비로 시끌벅적합니다. 그런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듭니다. 무뚝뚝한 인민군 중대장 정웅(김주혁)이 이끄는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이닥치고 설희의 정혼자인 반공청년단장 택수는 저 혼자 살겠다고 야반도주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장교 어딘지 낯이 익습니다. 그는 설희의 소싯적 첫사랑이었습니다.

이윽고 마을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돈푼께나 만진다는 옆 마을 백씨(김상호)가 맨 먼저 붉은 완장을 차고 홀아비 재춘(유해진)은 "빨갱이 만세"를 외치는 등 온 동네가 쌍수를 들고 인민군들을 반깁니다. 인민해방을 고대했던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일까요? 마을의 안전을 도모하고 손녀딸을 지키기 위해 구장어른을 중심으로 마을주민들이 '적'을 '동무'로 만들어 버리는 고도의 허허실실 작전을 펼쳤던 것. 

 마을과 손녀딸을 지키기 위한 구장어른과 주민들은 ‘적과의 동침’ 작전을 전개하고 인민군들은 총 내려놓고 소 끌고 쟁기질하며 경계를 허문다.

마을과 손녀딸을 지키기 위한 구장어른과 주민들은 ‘적과의 동침’ 작전을 전개하고 인민군들은 총 내려놓고 소 끌고 쟁기질하며 경계를 허문다. ⓒ RG엔터웍스


인민군 머리 꼭대기에 앉은 주민들의 기지로 정웅의 중대는 총을 내려놓고 모내기하며 주민들과 어울리더니 이제는 아예 눌러 앉을 태세입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인민군 연대장이 정웅에게 모종의 명령을 하달하면서 적과 동침하고 있던 석정리는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석정리에서 일어난 실화를 줄기로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들을 주요 장면으로 직조하는 만큼 영화의 리얼리티는 남다릅니다. 이 점은 시·공간이 비슷한 <웰컴 투 동막골>과 일정한 선을 긋는 대목입니다.

인민군과 마을 주민들이 형과 누나처럼 지내면서 서로를 기록해 가는 '석정리의 휴머니즘'에 남다른 감동이 배어 나오는 것도 여기에 연유합니다. 영화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을 석정리 사람들이 반세기가 지나서도 내뱉는 말은 하나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적과 동지로 편 갈라서 지랄들 할 참이여?"

분단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의 메시지

영화는 중반부까지 정웅과 설희의 애잔한 로맨스에 할애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들로 인해 알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시대의 이념과 사상에 가로막혀 끝내 장벽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들의 멜로라인에 재춘과 백씨 그리고 어리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봉기(신정근)의 코믹 트리오가 가세하면서 영화는 활력을 띱니다. 이들을 축으로 인민군과 주민들의 '동침' 과정을 질펀한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던 영화는 그러나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치열한 리얼리즘으로 급선회합니다.

영화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켜 주는 인물은 재춘입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아들 석호뿐입니다. 술 취한 김에 만리장성을 쌓은 과부 수원댁도 멀리할 정도로 지극정성입니다. 그런 재춘이 미군의 공습으로 아들을 잃고 실성한 채 거리를 헤매다 석정리를 향해 진격해 오는 미군 탱크를 향해 바위를 들고 깨부술 듯 들고가다 죽는 모습은 가장 뼈아픈 울림으로 남습니다. 냉전과 대결의 수레바퀴에 깔린 채 역사로부터 박탈당한 '재춘들'은 그렇게 쓰러져 갔으니까요. 

 방공호 유치를 위해 한바탕 힘겨루기를 했던 재춘과 백씨 등 양 마을 주민들이 작업반장으로 선출되기 위해 기를 쓰고 땅을 파고 있다.

방공호 유치를 위해 한바탕 힘겨루기를 했던 재춘과 백씨 등 양 마을 주민들이 작업반장으로 선출되기 위해 기를 쓰고 땅을 파고 있다. ⓒ RG엔터웍스


반면 백씨는 재춘과 상극을 이룹니다. 그는 일제강점기는 일장기를 흔들다 해방이 되어선 태극기를 흔들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적기를 흔들다가 미군이 주둔하면 성조기를 흔드는 인물입니다. 그가 앞뒤로 붙은 이승만과 김일성 사진을 두고 뭘 걸까 고민하는 모습이나 인민군 찬양에서 미군 만세로 돌변하는 장면은 제 아무리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도 카멜리온처럼 변신해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은 채 한국사회의 주류로 편입한 이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에 비해 정웅은 영화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공간을 상징하면서도 진부한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이 꿈꿨던 사회주의의 이상과 대립하는 현실로 인해 회의'하는 그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영화의 갈등구조의 중심에 서서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드러내며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캐릭터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첫사랑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기만 하는 그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약화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리얼리즘이 극대화되는 후반부에 영화의 뒷심을 떨어트리는 원인으로 꼽힙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오히려 몇 몇 대사에서 탄력을 받습니다. "일제 때나 미제 때나 시작은 모두 다른 이들이 했는데, 우리만 터지고 아프더라"는 설희의 대사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갈가리 찢긴 채 형극의 길을 걷던 민초들의 상처를 대변합니다. 반면 정웅이 백석의 시집에 써 넣어 설희에게 건넨 "이념도 체제도 시처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은 분단 조국을 향한 현재진행형 메시지입니다. 영화가 관객들을 웃고 울리면서도 분단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는 이런 리얼리티와 메시지가 상존했기 때문입니다.   

석정리 방공호에 묻힌 비극의 역사

영화에서 석정리는 '고향'을 상징합니다. 또한 석정리는 연합군과 인민군 양진영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정웅의 인민군 부대가 남하하며 스며들었듯이, 미군이 북상하며 스며드는 곳입니다. 결국 석정리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공간이 대립하고 충돌하고 있는 작금의 한반도에 다름 아닙니다.

정웅이 받은 명령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석정리에서도 전쟁의 비극은 가시화됩니다. 미군의 공습에 대비하게 위해 주민들이 방공호를 파지만 정웅은 최대한 천천히 파라며 재춘을 어리둥절케 만듭니다. 당진에 주둔한 인민군 연대장이 반동세력의 첩자노릇을 하는 주민들을 색출해 방공호에서 처형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공습이 시작되고 석정리는 쑥대밭이 됩니다. 마을에 잠입한 택수는 정웅에게 발각되고, 살려달라는 설희의 애원 끝에 정웅은 총부리를 거둡니다.

 인민군과 주민들이 함께 잔치를 벌리는 가운데 흥부전을 공연하는 석정리 사람들. 대동난장을 뜻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인민군과 주민들이 함께 잔치를 벌리는 가운데 흥부전을 공연하는 석정리 사람들. 대동난장을 뜻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 RG엔터웍스


퇴각을 앞둔 정웅은 마을 주민들을 창고에 가둬놓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합니다.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튿날 연대장이 도착하고, 마을에서 도망친 택수가 미군 탱크를 앞세우고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석정리의 방공호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끝에서 구장어른을 비롯해 살아남은 주민들은 미군들을 향해 붉은 완장을 찬 팔을 치켜든 채 "미군 만세!"를 목 놓아 울부짖습니다.

이 영화의 중심 시퀀스인 방공호와 관련해 할머니는 회상 인터뷰에서 실제로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한국전쟁이 과연 우리에게 남긴 게 뭔가,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님에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양민들의 비극"을 담겠다던 감독은 이 방공호를 통해 영화의 메시지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코미디로 시작해 멜로에 휴먼드라마 등으로 잔가지를 친 장르적 강박관념은 영화의 울림과 감동을 축소시킵니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답게 휴먼드라마로 일관하거나 <웰컴 투 동막골>처럼 코미디와 판타지를 절묘하게 조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동막골>의 가치를 계승했으면서도 영화의 지평을 진일보시키지 못한 한계로 지적됩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적과의 동침'을 권하는 이유

참여정부 시절 개봉한 <동막골>은 '햇볕 정책'의 정신을 판타지로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영화 장면 중 '동막골의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멧돼지를 잡기 위해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하는 대목은 '팝콘 눈'과 함께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북한의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10년의 세월'을 '공존의 밭'으로 비유하며, 시대정신을 담아 낸 영화의 위트 넘치는 해법은 스크린 속 '햇볕 정책'으로 관객들에게 각인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수로 옥수수 창고에서 수류탄이 터지자 팝콘이 눈처럼 내리고 이후 멧돼지 사냥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막골>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실수로 옥수수 창고에서 수류탄이 터지자 팝콘이 눈처럼 내리고 이후 멧돼지 사냥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막골>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 필름있수다


그 <동막골>이 스크린으로 녹여 내렸던 '햇볕 정책'이 밀봉된 지도 어느덧 4년. 대신 이명박 정부는 판도라 상자를 열고 '적대 정책'을 꺼내들었습니다. 이후 냉전과 대결의 사악한 기운이 한반도를 엄습했고, 상생과 공영의 집을 지으려던 '10년의 세월'은 말짱 도루묵이 된 듯 했습니다. 희망은 끝난 듯 했습니다. 그러나 온갖 재앙의 근원이 된 판도라 상자 속에 밀봉된 채 짓눌려 있던 '햇볕 정책'의 메시지는 스크린에서부터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적과의 동침>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천착한 <작은 연못>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노근리 사람들이나 석정리 사람들이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르지만 남과 북, 그리고 미국 등 냉전과 대결을 일삼던 세력이 그 배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일성은 반세기를 지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귀결됩니다. 두 사건 모두 한반도를 횡행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즉 냉전과 대결로 인해 촉발됐으니까요.

영화는 현실을 시청각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작업입니다.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이상까지 포괄할 경우 영화의 기능은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소총이 작대기가 되고, 수류탄이 터지자 팝콘이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동막골>이나 아이를 무등 태우고 쟁기질하다 흥부전 공연을 함께 보며 배꼽을 잡는 <적과의 동침> 장면만큼 평화를 갈구하는 상징은 없습니다. 이들 영화가 이명박 정부에게 '적과의 동침'을 권하는 이유입니다.

적에게 내 '곁'을 내어주며 따듯한 눈빛과 몸짓으로 그 '적과의 동침'을 권장하는 영화가 비극적인 엔딩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햇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차가운 바람 대신 따듯하고 부드러운 햇살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듯이, 냉전과 대결의 제로섬 게임 대신 '햇볕 정책'의 한줄기 햇살이 한반도에 깃들일 때, 상생과 공영이라는 이름의 봄의 전령은 찾아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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