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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예수, 내세가 아닌 모순된 현실 개혁위해 나서

북한과 네팔 등 빈곤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을 지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정토회 법륜스님은 일상의 삶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신도들의 종교적 질문을 현장에서 풀이해주는 즉문즉설로도 유명하다. 

한 신도가 "스님 사후에 세계에서 말씀해주십시오"라고 질문하자 법륜스님은 "질문하신 분은 내일을 압니까? 내일도 모르면서 죽은 다음의 사후 세계는 뭐한다고 알려고 합니까? 살아있는 지금, 그 오늘을 열심히 사세요.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되면 그냥 죽으면 되고 내일을 알려고 하다가 오늘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일찍이 붓다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통해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몸과 마음은  하나인가, 다른가, 사람의 본질은 사후에 존속하는가, 소멸하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고 또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을 비판했다.

현재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당장 독을 제거하고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만든 재료가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고, 또 그것을 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아내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삶은 낭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공자 역시 괴이한 것과 힘센 것, 어지러움과 귀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不語怪力亂神)으로 알려지고 있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그의 제자인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을 묻자 "산 사람을 섬기는 일도 모르는데 어찌 죽은 귀신을 섬긴단 말이냐"라고 했다. 또 죽음에 대해서도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공자는 내세나 어떤 초월적인 문제보다는 현세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내세와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는 기독교도 엄밀하게는 현세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는 로마제국 치하의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 그중에서 아웃사이더(죄인)로 취급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예수가 귀신을 축출한 것은 민중들의 현실적 고통을 풀어주고 하느님 나라(개벽)가 현세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 저 세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가 부활승천한 후 인류의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온다는 기존 기독교의 교리는 중근동 여러 종교의 영향을 받은 한 마디로 덧씌워진 신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세와 죽음을 이용해 신자들을 관리하면서 현상 유지하려는 교권 세력의 작품이다.    

어떤 종교든 현세에 기반을 두지 않는 종교는 없다. 앞으로의 종교는 내세를 심판의 장이 아닌 현재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주는 곳으로 이해하고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자신을 넘어 이웃의 삶까지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앙인들 역시 전통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 정신세계를 고양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필요한 몇 가지 종교적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성직자 의존에서 벗어나 신앙인 스스로 깨달음 얻을 수 있어야

1. 성직자에 의존적이 되지 말라: 선사시대 이후 과학혁명과 합리주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전까지 성직자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성직계급은 사회구성원의 영적 발전과 내적성찰을 이끌어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 계급은 지난 수천 년간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위를 유지하고 세습화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신화와 교리를 양산하고 제도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내세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귀신과 혼령을 불러내고 쫓는 등 자신들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대중들을 현혹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행위 즉 장엄한 예배의식, 일부지역의 성지화와 순례행렬, 자비행 또는 구원을 강조하며 걷어 들이는 헌금은 성직자들의 생존수단이다. 이들은 대가없는 의식은 어떤 결과도 나올 수 없다면서 종교창시자나 신의 이름을 빌어 막대한 헌금과 의식비용, 시주물품을 거둬들이고 있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은 원래 성직계급 출신이 아니었다. 붓다는 인도동북지역의 무사계급출신이며 예수는 팔레스타인 북부의 농민이었고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를 종단하던 상인 출신이었다. 이들 모두는 기존의 성직계급의 부당한 지배에 맞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 혁신적인 종교를 창시했다.

붓다는 열반에 들기 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네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法燈明)는 말을 남겼다. 깨달음과 구원은 성직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성직자는 종교의 문으로 들어서는 처음 단계에서 필요하다. 요즘은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경전과 수준 높은 종교서적(수행방법, 해설서 등)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나은 영적생활을 추구할 수 있다. 

2. 정기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물질적 소비와 '명예나 권력'같은 낮은 차원의 욕구를 실현하는 데 광적인 질주를 하고 있다. 성공을 향한 무한경쟁은 결과적으로 영혼을 타락시키고 윤리와 도덕을 마비시킨다. 돈과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자아(眞我)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세우기 위해서는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영성은 종교의 기본으로 부와 권력, 미신이나 일부 종교의 배타주의, 분리주의, 차별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영성을 회복하게 되면 우리를 지배하던 물질이나 마음의 혼돈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고 극단적인 이기심에 벗어날 수 있다.

물질 중심의 삶에서 곧바로 영성적인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자신을 통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성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하고 편안한 장소를 선택하고 처음에는 수행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요즘은 여러 종교기관에서 개별적으로 묵상과 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진정한 자아, 순수의식, 불성, 신성이야말로 우리의 본체이며 참나이고 육체나 물질은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치 속에 사람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내면의 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영성을 갈구하는 삶은 근본적인 행복을 찾아가는 문이며 지금까지 경쟁상대로 여겼던 사람들의 삶을 저해하지 않고 자신을 진정한 기쁨의 세계로 인도한다.  

3. 생태친화적인 삶을 살라: 오늘날 세계는 거의 모든 부문이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질보다는 정신을 강조하는 종교계조차 CEO형 성직자가 필요하다며 스스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기업은 이익창출을 원칙으로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탐욕의 장으로 인도한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사회공헌에 나서고 있지만 그것은 영리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드물게 양심적인 자본가가 있다고 해도 그 역시도 물질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과 기업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돈의 잠재적 형태로 보기 때문에 정신세계와 영성의 세계마저도 계량화시켜 버린다. 자본가들도 물론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 사찰과 교회, 순례자들의 안식처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정신적 안정을 통해 기업활동을 잘하기 위함이지 종교가 갖는 궁극적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중들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본래적 심성을 잃어버리고 기득권층의 심리조작에 굴복해 양심과 도덕의식을 상실한다. 생태지향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자본과 기업이 만든 탐욕과 삶의 시장화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삶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단순한 삶은 기업과 자본이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면서 사람들을 허위위식에 빠지게 하는 이른바 소비와 대량생산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먹거리는 가급적 채식을 하고 생협이나 가까운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대형할인마트는 기업가와 대주주의 부를 늘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을 뿐 지역공동체나 경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고 생필품 가격도 농민이나 영세업자들의 단가를 지나치게 낮춘 결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도 거의 없다. 그에 비해 생협은 비록 가격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소비자와 생산자의 건강과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삶의 질과 지역공동체를 살찌우는 역할을 한다.

주택과 교육도 시장의 교환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동체 지향적인 방법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택과 관련한 공동체운동이 활발하지 않지만 서구 몇몇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뜻에 맞는 사람들이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생산과 소비를 펼쳐왔다. 교육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도 대안학교, 가정학교(홈스쿨링)를 통해 아이들의 창의성과 삶의 폭을 넓혀가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단계이지만 현재의 문제들을 잘 극복하면 참다운 교육의 장을 열 것이다.

종교조차 자본에 종속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필요

4. 사회적 연대활동에 참여하라: 오늘날 대기업과 그들의 동맹노릇을 하는 국가는 대중들의 단결과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고 있으며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론, 어용지식인들은 "이 시대는 기업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만들어내고 기업가들의 불법과 기만적 활동을 눈감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인들 역시 '모든 것은 운명이다.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생명력을 운명의 장난감으로 만들고 현재의 질서에 복종하게 한다.

그리고 철저히 사회에서 물러나 개인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영성가들도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싸워서 과연 무슨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연대해봤자 그 열매는 정치가들에게 돌아갈 것인데 싸워서 뭐하겠는가?"라며 영성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허무주의와 영적 이기주의를 유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과 행동은 기득권자들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종교권력자들은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생에 가난하게 된 것이다. 운명 지워진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주장해왔다.

참된 종교인은 도덕과 윤리, 합리성을 가지고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억압적인 상황에 맞서야 한다. 불법과 다수의 희생위에 부를 축적하고 대중들을 억압하는 기득권층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부분에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 특히 종교인들의 경우에는 인류역사에서 기득권자들과 투쟁이 지난한 과정에 있었음을 감안해 지속적인 영적 수련을 통해 일반 정치가나 운동가들처럼 요란하지 않으면서 묵묵하게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내공을 가져야 할 것이다. 

5.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라: 오랜 역사를 통해 남성중심의 기득권세력은  다수의 이름으로 여성과 장애인, 동성애자, 비정규직, 이방인(오늘날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종교권력 역시 신성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며 소수자들을 배제시켜왔다. 여성은 정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등 불결한 존재로, 장애인은 불완전 존재로, 동성애자는 이성애라는 신의 보편성을 어긴 반역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한마디로 기성종교의 예배는 기득권자들이나 기복주의자, 그들만의 파티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일부 종교에서는 여성이나 장애인을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는 차별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한국사회 역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 한국전쟁, 군부통치를 거치면서 유교적 가부장제와 전체주의적 군사문화가 사회전체에 내재화되면서 소수자의 인권과 이익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붓다와 예수는 당시 체제의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붓다는 출신성분이 아니라 사람의 말과 행동이 그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말했고 예수는 당시 2등 국민이나 다름없었던 여성과 장애인을 구원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영적 깊이와 성찰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할 때 빛을 발한다. 붓다가 6년간 고행하고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깨달은 것은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가지 함께 제대로 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번 짧은 시간이나마 남을 위해 기도하고 시간이 날 때 다른 종교인들의 예식이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집회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외에 더 많은 것이 요구될 수 있으나 그것들을 실천하려면 종교에 온 일생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여기서 언급한 것들은 전문 성직자가 아니라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보통시민들이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것들이다. 특별히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4대강사업(실제로는 대운하)을 추진하면서 언론을 탄압하고 용산참사를 촉발시킨 인물이 개신교 장로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면 더욱 필요한 것들이다. 이러한 실천담론이 보편화될 때 한국종교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태그:#종교,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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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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