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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저녁밥상은 지역 청년들이 만드는 밥상 전환 운동이다. 배우고, 먹고, 놀고. 즐거운 혁명의 현장이랄까.
 소박한 저녁밥상은 지역 청년들이 만드는 밥상 전환 운동이다. 배우고, 먹고, 놀고. 즐거운 혁명의 현장이랄까.
ⓒ 김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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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그윽한 향이 감도는 커피 전문점이나 극장 앞에서 서성대야 할 청춘남녀 10여명이 좁은 사무실에 한데 모였다. 입과 눈이 쫑긋, 한 곳을 향해 집중해 있다. 갈치조림과 멸치볶음. 이들의 시선을 묶어 놓은 오늘의 메뉴.

지난 15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사는 미혼 남녀들이 의기투합해 모인, ‘밥짓는사람들’이 여는 ‘소박한 저녁밥상’ 요리교실을 찾았다. 이 날은 요리교실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무는 끝이 파래야 좋아요. 재료는 잘 준비하셨네요. 양파는 암·수로 구분하는데, 숫양파는 홀쭉하고 금방 썩지만, 암양파는 둥글고 저장이 용이하지요.”

재료 설명부터 요리 실전 ‘비기’까지 구체적인 레시피가 술술 나온다. 오늘의 요리 강사는 황금남 주부. 40년간 교직 생활을 하신 분이지만 오늘은 그저 평범한 이웃 어머니로서 초대되었다. ‘소박한 저녁밥상’ 요리 교실엔 전문 강사가 따로 없기 때문. 오랜 시간 가정에서 밥해온 이들을 진정한 살림의 고수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배우기를 자청했다. 살림에 전문가가 따로 있을까. 있다면 모두가 그러할 뿐. 그래서 그간 눈에 점찍어 이웃 주민들을 차례로 강사로 모셨다.

요리는 여자의 전유물? 언제 적 얘긴데요

일일강사의 지도 아래 직접 무를 써는 아기 아빠 김종성씨.
 일일강사의 지도 아래 직접 무를 써는 아기 아빠 김종성씨.
ⓒ 김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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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리교실의 ‘유별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요리가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은 이제 참 촌스러운 생각이 돼버린 시대다. 그래선지 우아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남편의 모습을 우리는 간간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고정관념이랄까. 요리는 결혼한 남녀가 하는 것이라는 통념.

김치볶음밥과 오므라이스 정도는 기본으로 해주는 미혼 남녀도 물론 많다. 허나, 된장나물 무침에 멸치조림, 시원한 우거지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척척 해내는 미혼은 흔치 않다.

요리교실을 계획, 운영하고 있는 ‘밥짓는사람들’ 운영진이나, 요리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수강생들도 대부분 미혼 청년들로 구성돼 있다. 주로 생명평화연대 회원, 지역 한살림 회원들이 함께 하고 있다.

“집 냉장고에 생선이 있는데 아무도 요리를 못하고 있어요. 오늘 배워서 처치하려고 왔습니다.”

수유동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나윤환씨는 직장을 마치자마자 이곳을 찾았다. 퇴근 뒤, 동료들과 술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며 찾아오기 쉽지 않았으리라.

“찾아오기 어려울 것 뭐 있나요. 여기 오면 배우지요, 먹지요, 그러면서 놀지요, 일석삼조랄까요.”

지난 6월 첫모임을 시작한 요리교실은 금번을 마지막으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유기농약식에서 두부, 찜닭까지 다양한 요리를 망라, 지역 청년 30여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다.

"생체권력, 식량주권...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죠"

일상 생활에서 젊은 남성이 느긋하게 앉아  밤을 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표백제와 방부제에 쩐 새하얀 밤 대신 신선한 유기농 밤을 까서 먹기위해 필요한 건 정성이다.
 일상 생활에서 젊은 남성이 느긋하게 앉아 밤을 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표백제와 방부제에 쩐 새하얀 밤 대신 신선한 유기농 밤을 까서 먹기위해 필요한 건 정성이다.
ⓒ 밥짓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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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짓는사람들’ 모임을 제안한 고영준씨는 요리교실을 진행하는 과정에 결혼도 했다. 요리 교실 덕분인지 살림을 잘 해 아내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젊은 청년들은 먹을거리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간의 생협운동,  먹을거리 운동은 주로 주부를 대상으로 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남성, 미혼은 소외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나이 또래 청년들이 요리를 매개로 어울리면서 요리도 배우고 좋은 먹을거리 문화를 되짚어 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 요리교실의 특징 하나가 바로, 양념과 재료를 모두 유기농을 쓴다는 점이다. 미혼 남녀가 관심 기울일 법한 케이크, 쿠키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메뉴를 선택하되 재료는 모두 유기농을 썼다.

덕분에 잘 못된 먹을거리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뿐 아니라, 습관을 되짚어 보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몸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이 많이 반성 됐어요. 집에서 만든 담백하고, 깔끔한 밥상을 외면하고 말초적 신경들이 이끄는 대로만 먹었던 같아요. 생체권력, 식량주권 등의 개념을 여기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게 되었네요.”

요리교실에 참여하다 본격적으로 ‘밥짓는사람들’ 모임에 결합한 김하윤씨의 말이다.

아토피. 지금 30대 부모를 둔 가정의 많은 아이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다. 30대야 말로 패스트푸드에 가장 본격적으로 노출당한 세대가 아닐까. 미혼 때부터 음식을 조심하고 올바른 먹을거리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청년의 때.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먼저 음식을 전환하기를.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은 청년 정신을 벼리기를 꿈꾸는가. 그렇다 해도 먼저 음식을 전환하기를. 우리의 입맛을 길들이고 선택을 강요하는 맛의 권력 앞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를. 그러기에 앞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일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기술을 공부하기를.

앞으로 ‘밥짓는사람들’의 행보가 궁금한 이유다.

요리가 끝나면 저녁 밥상을  함께 한다.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으레 먹기 마련인 '나쁜 음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뜻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요리가 끝나면 저녁 밥상을 함께 한다.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으레 먹기 마련인 '나쁜 음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뜻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 밥짓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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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지역, #청년문화, #먹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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