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폭격기', '그라운드의 여우', '헤라클레스', '바람의 아들'…. 굳이 이름을 뒤에 붙이지 않아도 별명만으로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별명은 선수들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물론 팬들이나 언론이 만들어준 별명이 있다는 것은 프로무대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야구 25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스타와 별명들이 생겨났지만 아직까지 필자의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별명은 바로 '검객'이라는 별명이다. 마치 검을 휘두르듯이 날카롭게 스윙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검객',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이 멋들어진 별명의 주인공은 바로 LG 트윈스에서 뛰었던 노찬엽(42)이다. 국가적인 사정으로 1년 늦게 데뷔한 노찬엽
현재 LG 코치로 변신을 한 노찬엽(왼쪽). 현재 LG 코치로 변신을 한 노찬엽(왼쪽).

▲ 현재 LG 코치로 변신을 한 노찬엽(왼쪽).ⓒ LG 트윈스

배제고 재학 시절이던 1980년, 불과 1학년의 나이에 팀의 주전 유격수로 출장을 하며 봉황대기 준우승을 이끌었을 정도로 노찬엽은 야구재능이 남달랐던 선수였다. 졸업 후 야구 명문 고려대에 입학을 한 뒤 국가대표로 활약을 하며 이른바 청소년대표-국가대표를 거치는 '야구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노찬엽은 1987년 MBC 청룡에 당당히 1차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노찬엽이 정식으로 프로에 데뷔를 한 시즌은 1989년이다. 노찬엽이 1987년 바로 입단을 하지 못하고 실업팀 농협 소속으로 뛰었던 데에는 국가적인(?) 사정이 있었다.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김재박·최동원·장효조·이해창 등 스타들이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참여하지 못하고 이듬해 입단을 한 경우처럼 프로선수가 국가대표로 뛰는 것이 금지되었던 예전에는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와 같이 커다란 국제대회를 앞두고 아마추어 스타급 선수들의 프로 입단이 한 해씩 보류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추어 스타들의 프로 입단 보류 조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시행되었는데 이때 프로입단이 늦춰진 선수들이 바로 프로야구 최다승 투수 송진우를 비롯해 이강철, 조계현 등 이었다. 그리고 국가대표 간판타자였던 노찬엽도 이때 보류대상으로 묶여 동기들 보다 늦은 1989년에야 프로에 입단을 하게 된 것이다. 데뷔 시즌이었던 1989년, 102게임에 출장을 해 .281의 타율과 56타점 13도루를 기록하며 타격 11위와 타점 13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친 노찬엽은 특히 53개의 볼넷을 얻어내며 이 부문 8위에 올랐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발이 묶인 2년 동안 칼을 갈았던 노찬엽에게 신인의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그해 신인왕은 19승을 따내 돌풍을 일으킨 태평양의 박정현에게 돌아갔다.) 바람을 가른 검객, 노찬엽 신인답지 않은 신인이었던 노찬엽에게는 '2년차 징크스'도 없었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LG 트윈스로 새롭게 유니폼을 갈아입은 노찬엽은 .333의 타율을 기록, 타격 3위에 오르는 활약을 펼치며 LG를 창단 첫 해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다. 1990년은 불과 1모 차이로 타격왕이 갈리는 희대의 접전이 벌어진 시즌이기도 했다. 타격 1위였던 해태 한대화의 타율이 .3349, 2위였던 빙그레 이강돈이 정확하게 1모가 뒤진 .3348이었다. 2리 차이로 타격 3위에 머물렀으나 노찬엽 역시 이들과 시즌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승부를 펼치며 타격왕 레이스를 주도했었다. 이들이 벌인 타격왕 경쟁은 조금 특별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승자를 알 수 없을 만큼 치열하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 '떳떳이 경쟁을 하는 것이 뭐가 특별한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타격왕 역사, 특히 접전이 펼쳐졌던 시기를 들여다보면 1990년 이들이 벌였던 타격왕 레이스가 왜 특별했는지 알 수 있다. 1984년 삼성은 이만수와 불과 타율 1리 차이의 경쟁자였던 롯데 홍문종을 9타석 연속 고의 4구로 걸러 보내는 추태를 부리며 이만수를 기어코 '타격 3관왕'으로 만들어냈으며 1989년 빙그레는 고원부(.327)를 시즌 막판에 아예 결장을 시키는 방법으로 삼성 강기웅(.322)을 따돌리고 타격왕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미명 아래 이런 낯 부끄러운 짓이 태연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으니 1990년 이들 세 명이 벌인 떳떳한 경쟁이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입단 2년 만에 타격왕 경쟁을 벌일 만큼 무섭게 성장한 노찬엽은 3년차이던 1991년, 뛰어난 선구안과 바람을 가르듯 날카로운 스윙으로 .317의 타율(타격 6위)을 기록, '검객' 노찬엽의 강렬한 이미지를 팬들에게 각인시키며 LG의 중심 타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스윙 1993년 5월 16일 광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 도중 노찬엽은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왼쪽 눈을 맞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부상을 치료하고 후반기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지만 노찬엽의 야구 실력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노찬엽은 93년 77게임에 출장을 해 타율 .244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타석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공을 노려보다 사정권에 들어온 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타로 만들어내던 검술과도 같던 노찬엽의 스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찬엽은 선구안을 잃어버렸다. 몸 쪽 공에 대한 공포도 그를 조여 왔다. 재기가 어려울 만큼 무너져 있었지만 1994년 노찬엽은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1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59타점과 .279의 타율을 기록, LG를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모두가 부활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니었다. 검을 내려놔야 하는 무사의 마지막 칼부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95년 노찬엽의 타율은 .254로 떨어졌으며 96년에는 .243의 타율을 기록했다. 주로 3번이나 5번 등 중심 타선에서 타석에 들어서던 노찬엽은 6번이나 7번 등 하위 타선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97년, '검객' 노찬엽은 69게임에 출장을 해 26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226라는 저조한 타율을 끝으로 무뎌질 데로 무뎌진 검을 내려놔야했다. 노찬엽은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극복해내지 못했다. 불과 33살, 너무나 아쉬운 은퇴였다. 사실 프로 9년간 통산 타율 .279, 통산안타 778개를 때려냈던 노찬엽이 '검객'에 어울리는 타격을 보여주었던 시즌은 '무사의 눈'을 잃어버리기 전 불과 몇 시즌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검객' 노찬엽의 스윙을 기억하고 있다. 쉽게 잊혀질 수 없을 만큼 그 시절 노찬엽의 스윙은 강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노찬엽은 헬멧을 꾹 눌러쓴 모습으로 여전히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고 있다. 노찬엽은 현재 LG 트윈스의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며 그라운드에 나서고 있다. 3루에서 후배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노찬엽을 보다보면 가끔은 그 시절 '검객' 노찬엽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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