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선린상고 4번 타자 박노준이 홈으로 뛰어들다가 발목을 부러뜨린 날, 주일학교의 선생님이었던 동네 여고생 누나들은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영문은 몰랐지만 그 날부터 나에게도 야구는 뭔가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그 해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내 친구들은 축구공을 내던지고 저마다 야구 글러브를 사기 위해 한바탕씩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그렇게 얻어낸 글러브를 들고,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동네 가운데 있던 공터로 모여들었다. 매일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던지고, 치고, 달리고, 또 투닥거렸다. 독특한 응원구호 '맞아라'
김인식 LG트윈스 2군감독(현) 김인식 LG트윈스 2군감독(현)
 김인식 LG트윈스 2군감독(현)
ⓒ LG트윈스 홈페이지

그 시절, MBC청룡의 2루수 김인식이 나는 싫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내 이름 '김은식'과 비슷했다. 물론 내 친구 동균이는 오른손잡이였으면서도 OB베어스의 윤동균을 흉내내느라 이따름 왼쪽 타석에 들어섰다. 성환이는 김성한이 되기 위해 엉덩이를 쭉 뺀 채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런데 나 '김은식'은 이름이 비슷한 '김인식'을 싫어했다. 김인식은 윤동균이나 김성한과는 다르게, 홈런이나 안타는 거의 못 치면서 공을 몸으로 맞고서라도 출루해보려고 일부러 등을 돌려대기도 하는 '구질구질한 데드볼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방망이를 들고 서면,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맞아라, 맞아라.", "데드볼, 데드볼." 다른 아이들에게는 '홈런, 홈런' 혹은 '안타, 안타'였을 응원 구호가, 바로 그 '데드볼왕' 김인식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맞아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김인식을 싫어했던 이유다. 김인식은 키가 작았다. 170cm도 채 되지 않았다. 예전이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들의 체격은 보통 180cm 가까이 됐다. 그래서 그라운드에서 여러 선수들과 섞여있으면 이빨이 쑥 빠진 우리들 잇몸 모양으로 허전한 것이 김인식의 자리였다. 그 작은 키에 새카만 얼굴 그리고 누렇게 흙물이 찌든 지저분한 유니폼. 그래서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베트콩'이었다. 생긴 것 부터가 '비호감'인 그의 플레이는, 어린 눈에 더더욱 거슬렸다. 일곱 시즌 남짓했던 선수생활동안 날린 홈런 개수가 딱 열 한 개였을 정도로, 그의 방망이는 빈약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그는 혹시 볼 넷을 얻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질기게 늘어졌고, 툭하면 기습번트를 시도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설상가상 몸쪽으로 날아온다 싶은 공에는 슬그머니 몸을 들이밀었다. 언젠가는 공에 맞았으니 걸어나가겠다는 김인식의 뒷통수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멀쩡하게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에 일부러 몸을 집어넣었다는 판정이었다. 그런 노골적인 노력 끝에 84년 시즌에는 3연타석 데드볼이라는 신기한 기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3연타석 데드볼이라는 진기한 기록 조그만 몸으로 공을 받아낸 김인식은 곧잘 타석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때로는 심판 바짓자락을 붙들고 울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절뚝거리며 1루에 나가는 모양을 보면서 곧 병원에라도 실려가려나 보다 하고 있으면, 또 언제 그랬느냐 싶게 들락거리며 투수 신경을 건드렸다. 심지어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대로 달려 2루로 올라섰다. 원년 그는 35개의 도루를 성공시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그런 집요함은 83년에 세운 114타석 무삼진과 시즌 전경기 무병살타 같은 '독한' 기록으로 이어졌다. 이래저래 투수들과는 상극인 타자였다. 안 그래도 작은 키 때문에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서 짜증이 난 투수는 끝까지 기다리다가 조금만 몸 쪽으로 붙여도 맞고 나가서 정신 사납게 하는 김인식을 혐오하다시피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김인식의 경기장면을 여럿 기억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 해 MBC가 눈에 드러날 정도로 'MBC청룡'의 경기를 집중 편성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내가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팀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전근이 잦은 아버지를 따라 떠돌던 내가 그 해 인천의 어느 변두리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년에 이미 패배와 관련한 불멸의 기록들을 대부분 세워버린 슈퍼스타즈가, 83년의 짧은 봄날을 지나자마자 다시 원년의 자기기록과 대결하며 길고 긴 연패를 거듭하는 동안, 나는 몇 해인가 야구를 전혀 보지 않고 살았다. 숱한 소년들의 프로야구 자체에 대한 정마저 끊어버릴 정도로 슈퍼스타즈의 추락은 여러 해에 걸쳐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내다가 문득 야구가 궁금해진 것은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1988년이었다. 슈퍼스타즈는 그 사이 '청보 핀토스'를 거쳐 '태평양 돌핀스'로 변신했고 시즌 세 번째 경기에서 핀토스가 만난 MBC청룡의 선발선수명단에는 김인식이 없었다.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은 김인식이 개막전부터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던 87년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606경기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장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로 OB베어스의 김형석과 쌍방울 레이더스의 최태원 선수가 이 기록을 넘어서기는 했지만 김인식은 아직까지도 역대 3위의 연속경기출장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맨몸으로 부딪혀 싸워온 세월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연관짓는 친구들도 없었다. 김인식은 야구선수로서의 생명을 마쳐야 할 시기에 이르고 있었고, 내 친구들도 이름 갖고 장난칠 나이는 조금씩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성적표의 숫자에 눌려가며 어차피 나 역시 항상 홈런 날리며 살지는 못하리라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코치겸 선수'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이따금 대수비를 들어오는 김인식을 보는 나의 감상은 이전과 영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촌스럽던 얼굴에 거친 나잇살이 붙어 논두렁에서 만나는 농사꾼 같던 그의 목덜미에서, 모자라는 재능이나 조건을 메우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혀 싸워온 세월들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에 타의로 교편을 놓고 '철가방'을 들어야 했던 내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또 그 두 남자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나의 앞날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은 4할 타자 백인천이나 22연승 투수 박철순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한 시즌이라도 3할 타율이나 10승 한 번 올려보는 걸 목표로 정진하는 보통 선수들, 혹은 그 보통선수들 안에 끼기 위해 밑바닥에서 달리는 후보 선수, 2군 선수들이다. 그리고 물론 그런 '밑바닥'들이 있기에 백인천과 박철순의 기록과 업적이 존재하고 또 빛나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의 매력은 단순히 승부의 짜릿함, 혹은 놀랄만한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벌써 스물 다섯 해를 이어오며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프로야구쯤 된다면, 그것은 삶을 돌아보며 비추고 떠올리는 오랜 친구, 혹은 두툼한 앨범이나 일기장쯤 되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짜릿한 승부의 순간을 떠나 그것 한 장씩 들추어보며 깊숙이 가라앉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김인식은, 프로야구사라는 내 일기장의 맨 앞장이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 방송한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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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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