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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한 전옥 |
1927년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신일선이 전남 화순의 부자 양승환과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첫 작품 <잘 있거라>(1927년)를 준비하고 있던 나운규에게는 자신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신일선의 공백이 급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운규는 <들쥐>(1927년)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전옥을 신일선 대신 출연시키기로 한다.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옥은 당시 16세로,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는다.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덕례다.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기회가 찾아왔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 <여직공 정옥>과 <농중조>가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여직공 정옥>에서 주인공으로 연기를 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전옥은 다음 공연인 <일요일>에서도 석금성을 대신해 역을 맡았다. 이 공연에서 흥분한 전옥이 "구주대전이 군국주의를 타파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삭제된 대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공연은 중단되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시달렸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극단이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1926년 2월 박승희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주요 단원들이 극단을 탈퇴하면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전옥은 앞서 말한 대로 나운규의 작품에 연이어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운규가 자신의 애인인 기생 유신방을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아리랑 후편>(1930)에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전옥은 영화를 떠나 다시 무대로 옮겼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한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다. 큰 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한 친일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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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규가 만든 <옥녀>의 스틸사진 |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그녀는 평생 백조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극단의 이름도 백조가극단으로 정한 것이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50년대 후반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하자 전국의 극장이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악극단은 자연 소멸의 위기를 맞는다. 백조가극단은 주력을 영화로 바꾸었다. 1960년 전옥과 최일은 백조가극단을 백조영화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1962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군소영화사들이 퇴출되면서 백조영화사도 문을 닫았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평론가 변재란은 전옥이 <고려장>(김기영 연출·1963)과 <쌀>(신상옥 연출·1964)에서는 무당역으로 신기 어린 카리스마를, <연산군>(신상옥 연출·1962)에서는 인수대비역으로 강력한 모성과 뒤틀린 권력욕을, <육체의 문>(이봉래 연출·1965)에서는 시골처녀를 팔아넘기는 포주역으로 악독한 모습을 연기해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