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CAF 2004 공식 한글 포스터
ⓒ SICAF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관 메가박스, 블록버스터보다 재미있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SICAF 2004'가 열렸다.

올해로 8회째가 된 이 만화 축제의 카피가 재미 있어서 글 앞머리에 인용해 보았다. 올해도 변함 없이 코엑스 메가박스에 둥지를 튼 SICAF에 출품된 작품들이 블록버스터보다 재미있으리라는 것은 영화 카탈로그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메가박스가 영화보다 재미있는지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영화보다 재미있다기보다 영화보다 "정신없다"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기자가 너무 늙었는지도 모른다) 코엑스 메가박스는 갈 때마다 사람 정신을 빼놓는 세팅을 참 잘 해 놓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찌됐건 만화 애니메이션 축제의 장소로는 이 곳 메가박스가 다른 영화제 장소보다 적합한 듯하다. 언젠가 반부패 영화제가 이곳에서 열렸었는데 어딘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근사한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데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 장소가 영화제의 의미, 분위기와 맞는가 하는 점은 첫번째, 두번째로 손꼽을 만한 중요한 사항이다.

▲ 개막식 사회를 맡은 배우 김혜나와 용이 감독
ⓒ SICAF
이 날 개막식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서울시장이 나와 축사를 했다. 특이하게도 영어로 먼저 축사를 하고 그 뒤에 한국어로 축사를 했다. 영화제의 국제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까, 다른 영화제에서 경험해 본 바 없는 방식이라 꽤 인상적이었다.

올해 SICAF 상영관에는 주 상영관인 코엑스 메가박스와 뚝 떨어진 시청 앞 서울광장도 들어 있어 서울시의 적극적인 후원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서울광장에서는 8월 4일부터 6일까지 매일 저녁 8시 반에 1회 무료 상영을 하니 강남까지 찾아올 시간이 없으신 직장인들은 퇴근 후 맥주 한 잔 가볍게 하고 여유 있게 서울광장으로 가셔서 오랜만에 동심에 젖어 애니메이션 구경 한번 해 보시라. 보고 나서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만화업체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계의 하청업체 대접밖에 못 받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안시 만화 축제에서 <오세암>이 대상까지 받은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젊은 애니메이션 인재들도 활발히 키워내고 있다. 사이트 www.sicaf.or.kr에 들어가면 무료로 볼 수 있는 인터넷 상영작들을 보면 재치있는 아이디어와 신선한 구성이 돋보이는 젊은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녀의 꿈>이다. 염승일 감독의 이 작품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떠올리게 한다. 삭막하고 인정 없는 도시에서 일하는 우리를 상징하는 로봇들, 그들에게 꽃씨 하나가 문득 날아오지만 그 꽃씨의 소중함을 알고 가꾸는 이는 한 소녀뿐. 마우스를 갖다 대는 "수고"를 해야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인터액티브 애니메이션인 <소녀의 꿈>은 색다른 구성으로 네티즌 투표 2위를 달리고 있다.

▲ 축사를 해 준 이명박 서울시장
ⓒ SICAF
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흥미있게 보았던 작품은 <쓰레기의 제왕>. 재활용을 잘 하는 인물과 아무렇게나 버리는 인물의 일상을 화면 분할을 통해 보여 준다. 그들이 버리는 물건들은 테트리스의 네모 칸 속에 하나하나 들어가는데, 재활용을 잘 하는 인물의 테트리스 게임은 동일한 쓰레기 상자들끼리 몇 개 쌓인 뒤 "Recycling!"하며 사라지고 그렇지 않은 인물의 테트리스 게임은 "Bang!"하며 그 종말을 맞는다. 5세에서 80세까지 쉽게 즐길 수 있어 한때 국민적 게임이었던 테트리스와 쓰레기 재활용이라는 아이디어를 잘 접목시켜 만든 근사한 소품이다.

인터넷 경쟁작은 대부분 단편들이며 보고 난 뒤에는 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한국 작품만이 아니라 온갖 나라에서 온 다양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즐겁게 보시고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시길! SICAF는 8월 10일까지 계속되며 구체적인 정보는 www.sicaf.or.kr에 들어가면 상세히 볼 수 있다.

'노아의 방주'에 똘레랑스가 없었다면?
개막작 <개구리의 예언>

▲ <개구리의 예언>에 나오는 주인공들

개막작으로 상영된 <개구리의 예언>은 정말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세시간에 걸쳐 밥 먹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애니메이션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6년여의 시간을 투자했다고 생각해 보라! 6년간 작품 하나에만 매달렸다면 그 고생의 흔적이 얼굴에 남았을 법도 한데, 그 6년을 오로지 즐겁게 보내기만 했던지 상영 뒤 리셉션장에서 만난 감독 자크-레미 제라르 (Jacques-Remy Girerd)의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개구리의 예언>은 첫 장면에서부터 '똘레랑스'의 철학을 보여 준다. "엄마! 아빠!"를 외치며 등장하는 한 백인 소년, 그 백인 소년이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는 흑인이며 아빠라고 부르는 남자는 뚱뚱한 할아버지다. 얘기를 좇아가 보니 흑인 여자와 백인 할아버지로 구성된 이 부부가 할아버지의 옛 동료 아들을 입양했다는 상황 설정이다.

한동안 전원적 풍경으로 일관하더니만 갑자기 개구리들이 40일간의 끔찍한 홍수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해 준다. 예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책 없이 40일간의 홍수에 휘말리게 되고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이들의 집으로 온갖 동물들이, 그것도 한쌍씩 꾸역꾸역 홍수를 피해 들어온다. 그렇다, <노아의 방주>다.

감독은 이 현대판 <노아의 방주>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서로 문제 없이 지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육식 동물들. 이들은 할아버지가 보관해 둔 28톤의 감자로 삶을 부지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 하기는커녕 갈수록 닭이니 양을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다. 할아버지는 이들에게 크게 화를 내고 "서로 배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임을 천명한다.

어린이 관객, 어른 관객 모두를 약간 혼란스럽게 할 질문은 중간에 등장한다. 등껍질로 빗을 만들기 위해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인간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거북이 한 마리가 음모를 꾸미기 위해 이 방주로 숨어들고 불만에 가득 찬 육식 동물들을 부추긴다. "할아버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어! 너희들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똘레랑스'냐 '자연의 법칙'이냐, 관객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결말에 가서 우세해 보이는 것은 결국 '똘레랑스'. 할아버지와 모든 동물들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거북이조차도 할아버지는 용서한다. "폭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중요한 메시지와 함께.

한 시간 반 가량의 이 애니메이션 작품은 디테일 하나로 사람을 웃고 울게 만들며 스토리를 끌고 가는 강한 힘이 있다. 8월 7일 저녁 8시 반과 8월 8일 저녁 8시 반에 메가박스 7관에서 재상영한다. 아이들과 함께 보기 정말 좋은 작품이다. 혹 이 시기에 못 보시는 분들은 제1회 서울환경영화제로 오시길. 일찌감치 초청작으로 찜해 버렸다.

자크-레미 제라르 감독과의 미니 인터뷰

- 여자 주인공 릴리가 엄마 아빠의 죽음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뜨릴 때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릴리의 목소리를 맡은 이가 누구였는데 그렇게 실감나는 목소리 연기를 했는지?
"그렇게까지 감동을 받았다니 정말 기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 딸이다. 내 딸에게 한국의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자세히 알려 줘야겠다."

- <개구리의 예언>을 만드는 데 6년이나 걸렸다고 들었다.
"첫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데 잘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웃음). 2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포스트 프로덕션하는 데만도 1년이 걸렸다. 이 일에 매달린 사람들이 2백명이니 적은 수는 아니다."

- 제작사인 폴리마쥬에 대해 소개를 좀 해달라.
"84년에 설립했는데 장편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단편과 시리즈물, TV 스페셜 등 많은 작품을 만들어 왔다. 마이클 두덕 드 비트 감독의 <수도승과 물고기>를 아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것이다."

-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인지?
"환경과 어린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될 것이다. (내년에 볼 수 있냐는 기자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손가락 네개를 뻗어 보이면서) 앞으로 4년 후에나 볼 수 있게 된다."

제라르 감독은 8월 11일까지 서울에 머문다고 한다. 브라운 계열의 옷을 입고 턱수염이 난 부드러운 인상의 프랑스 아저씨를 보면 말을 붙여 볼 것. "봉쥬르 무슈 제라르!"라고. / 강윤주
2004-08-05 13:5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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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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