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편집자말] |
지난달 말 성곡미술관에 들렀다. 오는 15일까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사진전이 열리는 미술관이다. 그 전시엔 50년간 묵묵히 '물방울'만을 그렸다는 김창열 화백의 제주 작업실 광경이 담겼고,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던 마르틴 김 여사가 기록한 남편과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창열 화백의 장남이자 제주 '김창열 미술관' 명예관장인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김시몽 교수는 이런 아쉬움을 토로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꽃도 인물도 그리지 않는 남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그를 '물방울 화가'라고 말할 때 나를 힘들게 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반 고흐를 해바라기 화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화가 반 고흐'라고 말한 다음에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한'을 추가할 것입니다. 마치 물방울 그림이 다른 장르의 그림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예술인 것처럼 말입니다."
첫 문장이 뭔가 탁하고 시각을 열어준다. 맞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다른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화가와 동일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는 살짝 의아함이 들었다. 유명 화백의 아들은 아버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좀 더 읽어 보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뾰족한 수염을 가진 그의 머리가, 뾰족한 그림자로 수염을 기른 물방울 모양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물방울의 모든 투명함과 순수함과 부드러움은 물방울처럼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투명한 자신의 인격을 반영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반으로 나뉠 것이다. 김창열 화백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로. 혹은 '물방울 그림'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그건 동명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관객을 한국 추상미술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느냐란 질문과 마주하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레 겁먹을 건 없다.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미술 자체나 미술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투명한 인격을 말방울 그림에 투영해 왔던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화가를 바라보는 화자이면서 공동연출을 맡은 이는 다름아닌 김 화백의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이다.
프랑스 감독 브리지트 부이요와 함께 공동연출과 음악까지 도맡은 이 다재다능한 종합예술인은 아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인격과 예술이란 흔치 않은 주제를 놀랍도록 침착하고 차분하게 다루는 깊이감을 선보인다. 그 깊이감이 영화와 미술과 음악을 아우르고, 주제와 형식을 탁월하게 조율한다.
그리하여 김 화백을 알았든 몰랐든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관람한 이는 자연스러운 공통의 욕망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더 많은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감상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말이다. 물론 이 흔치 않은 다큐의 미덕은 그 뿐만이 아니다.
"물방울 그림,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