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기자말]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강 선생, 혹시 파블로 에스코바르라고 아나? 30년 전에 전 세계 마약왕이었어. 한때는 자동차 만드는 제네럴모터스보다도 일 년 수익이 많았고, 콜롬비아 정치권도 조물조물 주무르면서 왕으로 군림했던 양반이야. 근데 그 양반 최후를 알아? 미국 DEA(마약단속국)한테 쫓겨서 슬리퍼 신고 도망치다가 총 맞고 비명횡사했어."

<수리남>의 전요환(황정민) 목사는 말한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넷플릭스 <나르코스> 속 바로 그 콜롬비아 마약왕이다. '수리남 마약왕'은 그렇게 미국에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며 열변을 토한다. 자신에게 미국령인 푸에르토리코에서의 마약 거래를 권하는 강인구(하정우)에게 말이다. 

자, 그러니까 <수리남>을 만든 윤종빈 감독 이하 제작진도, 시리즈를 제작한 넷플릭스도 잘 알고 있다는 뜻 되겠다. 무엇을? 이 '한국인 중남미 마약왕' 이야기가 넷플릭스를 작금의 반열에 올려 놓은 일등 공신 중 하나인 <나르코스> 시리즈의 자장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일견 뻔뻔하다. 다른 말로 바꾸면 자신만만하다. 자, 그럼 이런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은 어떤가.  

"칼리 카르텔과의 전쟁이라고요? 정말 황당한 궤변이군. 근데 그 궤변이 설득력이 있네." 

한국 국정원 팀장 최창호가 "이 작전은 넓게 봐서 칼리 카르텔과의 전쟁입니다"라며 전요환 검거 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미국 마약단속국(DEA) 팀장이 내놓은 답변이 걸작이다. 카리 카르텔이 어떤 조직인가. <나르코스> 시즌3가 역작으로 완성한 대로, 에스코바르 검거 직후 콜롬비아 마약왕 자리를 꿰찬 마약 패밀리 조직이 아니던가. 

<수리남>의 뻔뻔함과 자신만만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나르코스> 시리즈의 자장 아래 놓인 태생적인 위상을 거부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런 전형성은 <수리남>을 시청코자하는 영상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장르적 매력으로 기능한다. 

고민은 있다. 칼리 카르텔까지 엮어내는 "황당한 궤변" 같지만 그래서 더 완벽히 '수리남 한국인 마약왕' 검거작전의 설득력을 작품 내적으로 추구할 것. 또 보편성과 독창성, 한국화를 무기로 <나르코스> 시리즈란 걸작에 가까운 레퍼런스를 넘어서거나 그 레퍼런스를 모르는 전 세계 시청자들까지 만족시킬 것. 

<수리남>은 이 험난한 여정을 무리없이 헤쳐나간다. 시중의 표현처럼 윤종빈 감독이 '이 어려운 걸 해낸다'. 윤 감독이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나 <공작>과 같은 전작들에서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장기들을 집대성한 <수리남>은 처음 만나는 '한국인 중남미 마약왕' 이야기를 통해 넷플릭스란 플랫폼을 통한 K-컬처, K-드라마 신드롬을 재확인시켜 줄 것이 확실시 된다. 그만큼 매력적인 외형을 갖췄단 뜻이다. 

<수리남>이 갖춘 매력적인 외형들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여기, 가족의 생계와 지난한 인생의 역전을 위해 그 이름도 낯선 중남미 국가 수리남에 도착한 이가 있다. 이 소시민 가장의 이름은 강인구. 어릴 적 지독하게 가난했던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유도부 선수로 출발, 유흥주점 알바를 거쳐 사장에 이르고, 이후 카센터 사장, 주한미군 납품업자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벌다 결국 '친구따라 수리남'까지 당도하기에 이른다. 

왜? 수리남인들은 안 먹지만 한국 사람들은 환장하는 홍어를 가져다 팔기 위해. 사업은 순조로울 것만 같았다. 중국인 마피아 첸진(장첸)이 거액의 보호비를 요구했지만 그것도 맞춰주려고 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수리남에서 한인 교회를 운영하는 전요환 목사를 만나기 전까지, 강진구의 수리남 사업기는 2000년대 평범한 한국 가장의 해외 성공기와 다를 바 없었다. 

이후로는 짐작 반 놀라운 설정 반이다. 전요환은 수리남 마약왕이었고, 범죄종교 왕국의 제왕이었으며, 한국과 아시아 유통망 개척을 위해 강인구의 홍어들에 코카인을 넣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즉각 강인구는 철창행 신세가 되고, 수리남행을 이끌었던 절친은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객사한다. 

떼돈은커녕 나락으로 떨어진 죄수 강인구에게 국정원 미주지부 팀장 최창호(박해수)가 접근해 온다. 전요한을 잡기 위해 협력해 달라고, 다시 수리남으로 가서 전요환 일당에게 코카인 유통을 미끼로 접촉하라고, 잃은 돈은 국정원에서 보전해 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말이다. 두 아이의 교육열에 불타오르고, 친구의 비명횡사에 대한 복수심이 샘솟으며, 무엇보다 돈을 벌고 싶은 가장 강인구는 이 말도 안 될 것 같은 제안을 덥썩 받아들인다.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남미 마약왕의 흥망성쇠와 이를 잡으려는 DEA의 동분서주라는 레퍼런스는 잊어도 좋고, 이따금 복기해도 상관없다. 그보단 <수리남>만의 설정들을 따라잡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흥미롭다. 예컨대 이런 방식들. 
 
<수리남>은 K-드라마 답게 강인구의 가장으로서의 존재감과 책임감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윤종빈 감독이 전작 <범죄와의 전쟁>에서 세관원이던 최익현(최민식)의 흥망성쇠를 내세워 한국의 공무원 사회와 검찰, 그리고 조폭의 혈연, 지연, 학연의 삼위일체가 뭐가 크게 다르냐고 강변했던 주제 의식과 얼핏 대칭을 이룬다.  

사기꾼이자 마약 밀수꾼이던 전요환을 실화와 달리 해외 한인 목사로 설정한 아이디어 역시 한국사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일부 한국 사이비 개신교 목사들의 범죄 행각을 가져온 것도 맞지만 <수리남>의 설정은 그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궁금하시다면 작은 섬나라 피지의 정치권과 경제를 주무르던 은혜로 교회 사건과 목사 모녀의 패악질 사건을 찾아 보시길. 

과거 홍콩과 대만 거장들인 고 에드워드 양과, 왕가위, 이안 감독이 사랑했던 장첸 배우를 캐스팅하는 수완을 보여준 중국계 마피아와의 대립 역시 <나르코스> 시리즈에서 볼 수 없던 <수리남>만의 남다른 설정이다. 저 멀리 남미에서 한국과 중국이란 극동아시아 갱단끼리 벌이는 라이벌전은 이국적이란 표현 그 자체다. 다시 말해, 구조와 캐릭터 자체가 출중하단 얘기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 

K-콘텐츠의 현재 <수리남>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강인구란 캐릭터를 이루는 요소들은 K-가장, 가난이 싫은 소시민성, 그리고 약간의 마초성과 성공에의 욕망 등이다. 유흥주점에서 행패를 부리는 경찰 공무원을 때려 눕힌 뒤 수리남행을 결정한 강인구는 이때부터 자기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가 일종의 '언더커버'를 수락하는 것도 그때문인데, 거기에 더해 천문학적인 현금이 오고가는 범죄 현장과 연기(언더커버)에의 매혹도 부정할 수 없는 요인으로 기능한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톰 크루즈 주연 <아메리칸 메이드>도 비슷한 묘사가 등장한다. 항공기 파일럿이던 주인공이 CIA의 제안을 받고 에스코바르 카르텔의 마약을 운반하면서 겪는 흥망성쇠와 범죄 및 금전에의 매혹이 바로 그것이다. 그 매혹이야말로 강인구의 자기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열쇠말이라 할 만하다. 1화 초반 강인구의 전사를 꽤 공을 들여 구축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고. 

또 <수리남>이 출중한 덕목 중 하나는 과잉이나 전시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요환의 악행을 묘사함에 있어 쉬이 빠질 수 있는 폭력의 전시가 <수리남>엔 거의 없다. 익히 예상할 법한 요란한 갱단 간 혈투도 전체 구성에 있어 꼭 필요할 때 써먹는 식이다. 

그러니까 단단한 장르 법칙 안에서 구조와 캐릭터 구축에 훨씬 더 공을 들였다. 그 액션신의 빈도가 제작비나 제작 환경에 정비례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동종 할리우드 시리즈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반면 남미 마약 마피아 서사를 공유하는 <남부의 여왕>처럼 극과 표현 전부를 멜로 드라마화시키거나 과잉의 미학을 동력으로 삼는 '오버'와는 단호히 거리를 둔다.    

언더커버 및 스파이 장면에서의 긴장감 역시 윤종빈 감독의 전작 <공작>을 뛰어넘는다. 끝끝내 의심하는 전요환과 어떻게든 속여서 금전을 획득하고자 하는 강인구, 그리고 3년 동안 전요환을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최창호 심리전이 2화 이후 거의 매회 외줄타기식으로 펼쳐진다. 그 사이사이 강인구의 변호사 데이빗 박(유연석), 한국계 중국인이자 강인구의 심복인 전도사 변기태(조우진) 등을 배치하고 부각시키는 설정 자체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특히 역시나 국정원 '언더커버'라는(황정민이 역할을 뒤바꾼) 설정을 공유하는 <공작> 속 긴장감의 경우, 남북 대치 관계라는 한국적 특수성에 기댄 측면이 강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중남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리남>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훌쩍 뛰어 넘어 버렸다. 

애초 <수리남>은 장편영화로 기획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6부작 시리즈로 방향을 튼 기획으로 알려졌다. 혹자들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면 좀 더 박력이 넘쳤을 거란 평가를 내놓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기엔 <수리남>은 욕심이 많은 시리즈이기도 하다. 일례로, 6화 속 정글을 비행하는 헬기를 통한 검거 장면의 경우 K-드라마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도전임이 틀림 없다. <수리남>의 시각적 욕망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장면을 통해 효과적으로 승화되는데 120분 안팎이나 140여 분이란 상영시간에 이를 배분했다면 분명 두 가지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시각적 장쾌함이 빈곤하거나 서사 구축이 빈약하거나.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배우들의 경우, 익숙함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부단히 경주한다. 특히 <신세계>와 <아수라>가 소환될 수밖에 없는 황정민의 경우가 딱 그러하다. 반면 <범죄와의 전쟁>의 거울상과 같은 하정우의 캐스팅은 영화 밖 재미 요소다. 

윤종빈 감독조차 충분히 고려했을 이 같은 캐스팅은 조우진의 후반부 대활약으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또 하나, 자칫 '서프라이즈' 급으로 떨어질 수 있는 서양인, 중국인 캐스팅이나 우리 배우들의 영어, 중국어 연기가 어색하지 않은 것도 <수리남>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주목할 만한 요인이다. 

그리하여 350억을 들이고 제주도를 비롯해 국내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찍었다는 <수리남>이 무엇을 남기느냐고. 누구는 출중한 장르물, 범죄물로 받아들이고, 또 누구는 근래들어 실망감을 안겨줬던 K-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멋진 재림으로 인식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윤종빈이라는 중견 감독이 <범죄와의 전쟁>과 <공작>을 통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장르를 남미의 한국인 마약왕이란 그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소재를 시리즈로 완성한 역작으로 평할 공산이 커 보인다. 참고로, 11일(현지시간)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수리남>은 월드 차트 8위로 데뷔했고, 14일에는 3위로 올라섰다. 9월 둘째주 주말을 통과하며 어디까지 뛰어 오를지 주목된다. 

끝으로, <수리남>이란 프로젝트 자체가 어쩌면 K-컬쳐, K-콘텐츠의 어떤 풍경과 동력을 텍스트 안팎에서 근사하게 혹은 명민하게 수행하고 입증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할리우드나 북미 시리즈가 잘 해왔고 계속 해왔던 장르에 도전하면서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인들의 감성이나 눈높이에 더 밀착하고 거기에 사회적 현실을 얹는 이를테면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사례 말이다. 일단 불호보다 호에 가까운 평이 더 많은 <수리남>의 최종 목적지가 궁금해진다.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수리남>의 한 장면.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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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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