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명주공> 포스터.
(주)시네마달
1_지방 도시를 무대로 한 아파트 재개발 풍경
충청북도 청주시 봉명동 주공아파트 1단지는 1983년 연말에 완공된 지역의 1세대 아파트 단지로 총 574세대가 거주해 왔다. 이 단지는 2007년 건물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은 후 재건축을 추진했지만 경기침체와 조합 내 교통정리 등으로 난항을 겪으며 10여년간 표류해 왔었다. 2020년 6월이 되어 드디어 재건축을 위한 철거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5년 완공된 주공아파트 2단지는 재개발 추진 중이나 아직 구체적 진전이 없는 상태) 철거가 완공되면 1단지 자리에는 'SK뷰 자이' 1745세대가 2024년에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2020년 2월, 일군의 사람들이 이달 말이면 철거가 시작될 단지 내부를 촬영하고 꽃과 나무가 무성한 중에 지극히 일부를 구조 작업 중이다. 이들은 지나치다 만나는 주민들과 인사하고 사연을 나눈다. 단지 내 곳곳에는 재개발 사업과 조합을 반대하는 현수막 등, 유사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 가운데 사진촬영과 식물채취에 여념이 없던 일행은 숲 해설가 못지않게 단지 내 식생을 설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탄한다. 곧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
시간대가 바뀌어 3개월 전으로 거슬러간다. 2019년 11월 겨울 초입에 단지 재개발이 확정되던 순간이다. 주민들은 이사 준비에 한창 여념이 없다. '감나무 아저씨'는 대부분 베어 없어질 초목을 안쓰러워한다. 이미 이사를 갔으면서도 볼일 보러 가던 길에 자꾸만 들르게 된다고 한다. 김경희씨 가족은 단지에서 함께했던 추억과 삶의 흔적들을 촬영 팀에게 찬찬히 들려준다. 송이네 가족은 딸 송이가 탄생할 때부터 이제 성인이 되어 이사를 돕는 풍경까지 가족의 시간을 카메라에 기꺼이 공유해준다.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 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던 '흥부자' 강은순 할머니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며칠이고 들려줄 기세다.
다시 시간은 물리적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남았던 이들이 이사를 떠나기 시작하고 건물들은 봄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단지 구석구석을 채우고 꽃길을 만들어줬던 초목들도 건물이 철거되는 것과 함께 하나둘 사라져간다. 일부는 용케 옮겨질 기회를 얻지만 단지의 역사를 지켜보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함께 성장해왔던 거목들 대부분은 단지와 운명을 함께할 상황이다. 철거업무를 맡은 이들이 직무에 충실한 자세로 무덤덤하게 나무를 베어낸다. 그렇게 한 세대를 보낸 아파트 단지와 그곳의 풍경이 사라져간다.
2_상실을 기억하려는 세 그룹의 앙상블
봉명주공아파트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뉜다. 이들은 각개 약진으로 기억 작업을 시작했지만 서로 마주치면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하게 된다.
지은숙 & 지명환 두 시민 사진작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봉명주공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지 건물들, 그곳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주민들, 그리고 인간 주민 외에 그곳에 함께 공존했던 새와 고양이, 개, 그리고 식물들을 꾸준히 기록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이어간다. 2019년 봄부터 2020년 가을까지 마지막 2년 가까운 시간이 그들의 카메라에 가득 기록된 셈이다. 이들은 약 5만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그 방대한 아카이브에는 봉명주공의 생명과 파괴가 모두 포함된다. (이들의 작업은 영화와 별도로 2020년 연말에 전시회를 가진 후 <봉명 주공 아파트 사진집>으로 발간되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식물네트워크'는 그 어느 국내 아파트 단지보다 단지 내 식물 구성원 비중이 높았던 봉명주공에서 주민들이 떠난 후 남겨진, 혹은 버려진 식물들 중 가능한 만큼이라도 구조하려는 이들의 모임이다. 30여 년간 사계절 변화를 알려주고 도심 한복판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던 식물들 중 극히 일부라도 구하려는 자발적 선의의 집단인 셈이다. 이들은 정성스럽게 함께 하는 이들에게 식물에 대해 지식을 공유하며 작업을 이어나간다. 물론 그들이 구조할 수 있는 식물의 총량은 모양새가 빼어나거나 인기 있는 수종이라 다행히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질 양에 비해선 턱없이 적을 테다. 하지만 봉명주공의 꽃나무들을 소중히 아끼던 주민들의 마음을 계승한 이들은 단연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카메라의 시선이 따른다. 영화를 만든 김기성 감독과 촬영 팀이다. 앞서 봉명주공의 마지막을 함께 추념하고 기록하기 위해 따로 또 같이 작업하는 이들보다 한발 늦게 온 덕분에, 오히려 3자가 동시에 분업하듯 각자 역할을 소화하면서 어우러지는 통합력을 발휘한 셈이다. 감독은 원래 청주가 고향이었다고 한다. 학부에서 환경조각을, 유학시절 미디어아트를 전공한 감독이 귀국해 자신의 고향에서 이야기를 찾다 발견한 봉명주공의 상황은 공공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그를 사로잡았고, 자신의 첫 장편영화 작업을 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청주동물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동물, 원>을 작업했던 왕민철 감독과 제작진이 함께 가세했다.(제작, 촬영과 편집, 음악작업이 <동물, 원> 스태프와 공유된다) 청주라는 지역에 소재한 공간을 무대로 '생명'에 대한 묵직한 고민이 이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