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20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쓴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봉준호가 곧 장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세계 관객들과 영화인들에게 사랑 받는 감독이다. 복수 3부작을 비롯해 <박쥐> <아가씨> 등을 연출한 박찬욱 감독 역시 2004년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박쥐>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을 정도로 '거장'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도 흥행실패에 좌절하던 신인 감독 시절이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이성재, 배두나 주연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서울관객 5만7000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고 박찬욱 감독 역시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서울관객 99명, <3인조>가 서울관객 3만6000명에 머물면서 감독생활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물론 <웰컴 투 동막골>로 800만 관객을 모은 박광현 감독이나 <범죄도시>로 680만 관객을 모은 강윤성 감독처럼 장편 데뷔작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감독도 있다. 하지만 이 감독처럼 데뷔 후 5편의 작품을 연속으로 성공시킨 감독은 찾기 어렵다. 200만 관객을 모은 장편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부터 커리어 두 번째 천만 영화였던 <암살>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5편의 연출작을 모두 성공시킨 '흥행불패' 최동훈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을 시작으로 연출한 장편영화 5편을 모두 흥행시켰다.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을 시작으로 연출한 장편영화 5편을 모두 흥행시켰다. ⓒ (주)쇼박스

 
최고의 흥행 보증 수표

전주 출신의 최동훈 감독은 서강대 국문과에 진학해 박찬욱 감독이 속했던 서강대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학졸업 후 영화 아카데미에서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최동훈 감독은 2000년 임상수 감독의 <눈물>에서 조연출을 맡으며 영화인으로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많은 단편 영화에서 촬영, 조명, 연출 등을 경험한 최동훈 감독은 2004년 한국은행을 터는 사기꾼들의 이야기 <범죄의 재구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공식 데뷔했다.

최동훈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에 박신양, 백윤식, 염정아, 이문식 등 여러 배우들의 명연기가 더해진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적인 범죄 사기극으로 사랑받으며 전국 210만 관객을 동원했다. 손익분기점(150만)을 가뿐히 뛰어넘은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특히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을 통해 청룡 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신인 감독상과 각본상을 싹쓸이하며 충무로를 뒤흔들 '슈퍼루키'의 등장을 알렸다.

최동훈 감독은 2006년에 선보인 <타짜>로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데뷔작의 성공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2009년에 만든 <전우치>에서는 성적이 약간 떨어져 610만 관객을 불러 들였다. 하지만 당시 <전우치>와 맞대결을 벌인 영화는 다름 아닌 전세계 극장가를 평정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였다.

<전우치> 이후 2년 이상 공백을 가진 최동훈 감독은 2012년 김윤석, 이정재, 전지현, 김혜수, 임달화, 오달수, 김수현 등 스타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해 신작 <도둑들>을 선보였다. <도둑들>은 13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최동훈 불패 신화'를 이어갔다. 특히 <엽기적인 그녀> 이후 뚜렷한 흥행작 없이 슬럼프를 겪던 전지현은 <도둑들>을 시작으로 <베를린>, <별에서 온 그대>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최동훈 감독은 2015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암살>로 '쌍천만 감독'에 등극했다. 특히 최동훈 감독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던 김윤석, 주진모, 백윤식 대신 하정우, 조진웅, 이경영 등 처음 작업하는 배우들과도 좋은 호흡을 과시했다. 2004년 데뷔 후 총 5편의 영화를 연출해 4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최동훈 감독은 지난 4월 류준열,김우빈, 김태리, 소지섭, 염정아 등이 출연하는 신작 <외계+인>의 촬영을 마쳤다.

관객과의 두뇌싸움 대신 재미를 택하다
 
 멜로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박신양의 사기꾼 연기는 <범죄의 재구성>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였다.

멜로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박신양의 사기꾼 연기는 <범죄의 재구성>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였다. ⓒ (주)쇼박스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제목만 보면 관객들이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 해답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극히 관객 지향적인 최동훈 감독은 극장을 찾은 고객들에게 힘든 문제를 내주지 않았다. 대신 유쾌하고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면서 캐릭터가 가진 매력으로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야기 속에 작은 반전이 들어있지만 영화의 흐름을 극적으로 뒤집는 결정적인 장치는 아니다.

<범죄의 재구성>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박신양이 연기한 사기꾼 최창혁이다. 그동안 <편지>, <약속> 같은 영화를 통해 멜로 전문배우의 이미지를 쌓았던 박신양은 <범죄의 재구성>을 통해 사기꾼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특히 최인경(염정아 분)에게 칠레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차이를 설명하고 올바른 달리기의 자세(전방 35도를 바라보며 호흡은 '씁씁후후'를 하라고 한다)를 가르치는 박신양의 뻔뻔스러운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최동훈 감독은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사기꾼들이 쓰는 은어들도 친절하게 설명했다. 사기 치는 것을 '접시 돌리기', 사기 치는 대상을 '저금통', 사기 기술자들을 '영화배우', 사기 경력을 '이력서'로 표현하는 <범죄의 재구성> 속 사기꾼들의 은어들은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과 동시에 관객들이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범죄의 재구성>은 김선생(백윤식 분)을 비롯한 사기꾼 5인조가 한국은행을 털고 최창혁이 다시 김선생에게 사기를 쳐서 4년 전 자살한 형(박신양이 1인 2역을 연기했다)의 복수를 하는 것이 주요 스토리다. 물론 최창혁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복수가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순 없지만 결국 최창혁은 형의 복수를 하면서 사기에도 성공하게 된다. 

<범죄의 재구성>은 최창혁과 최인경이 또 다른 사기를 진행하는 에필로그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탐욕스러운 사람, 세상을 모르는 사람, 세상을 너무 잘 아는 사람, 모두 다 우리를 만날 수 있다"라는 최창혁의 내레이션에 이어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라는 최인경의 대사가 이어진다. 이는 최동훈 감독이 116분 동안 말하려 했던 <범죄의 재구성>의 주제이자 교훈이다.

천호진-김윤석-박원상, 명배우들의 보물창고
 
 <범죄의 재구성>은 주·조연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모든 배우가 높은 존재감을 발휘한다.

<범죄의 재구성>은 주·조연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모든 배우가 높은 존재감을 발휘한다. ⓒ (주)쇼박스

 
사실 신인 감독의 영화에는 검증되지 않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범죄도시>의 진선규나 박지환처럼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력이 많지 않은 배우의 연기와 신인감독의 여물지 않은 연출이 만나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범죄의 재구성>은 대중들에게 검증된 배우들은 물론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진주 같은 배우들이 총출동해 영화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

차반장 역의 천호진은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를 많이 했던 배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시민적인 형사반장 연기를 선보였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차반장은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르는 자료를 내팽개치고 최창호의 소설에 빠져 감탄한다. 특히 사라진 돈을 보며 뜬금없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 태양 아래 진짜… 볼 면목이 없다 내가"라고 탄식하는 연기는 천호진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장면이다.

천호진의 옆에는 항상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와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연기괴물'로 꼽히는 김윤석이 있다. 당시만 해도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던 김윤석은 최동훈 감독에게 발탁돼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형사를 연기했다. 사실 이형사는 대사도 거의 없는 조·단역이었는데 최동훈 감독은 차기작 <타짜>와 <전우치>,<도둑들>에서 연이어 김윤석을 캐스팅했고 그렇게 김윤석은 오늘날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 됐다.

박원상도 <범죄의 재구성>에서 얄미운 제비 역을 통해 충무로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휘발유 역의 김상호 역시 <범죄의 재구성>에서 순박한 연기로 관객들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명회, <육룡이 나르샤>에서 하륜을 연기했던 조희봉은 김선생을 총으로 쏴 죽이는 비리경찰 박형사를 연기했다. 이 밖에 김윤석과 함께 '최동훈 사단'의 대표배우로 꼽히는 주진모도 조사 계장 역으로 영화 속에서 잠시 얼굴을 비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 박신양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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